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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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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o_profile 신외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72회 작성일 2006-09-2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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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처럼

신외숙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강원도 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초등학교로 떠나기 위해 소양호로 갔다. 그곳에서 쾌속정 배를 1시간 타고 ○○ 뱃터에 닿았다. 봄이라 그런지 선착장 근처에 진달래와 봄꽃이 만연했다.

특히 만개한 벚꽃이 얼마나 눈부신지 객지(客地)임을 실감나게 했다. 그곳에서 버스로 20분 걸려 읍내에 내리니 시멘트 포장도로에 공공 기관과 상가 건물만 몇 보일 뿐 완전 시골이었다.

읍내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근무하게 될 ○○리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됐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최전방 지역답게 온통 푸른색 일색이었다. 국방색 군복과 군 지프차, 군부대 연병장과 가끔씩 들리는 소총 소리와 푸른 벌판…….

이따금 장교와 사병들이 지프차에서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농지가 대부분이라고는 하지만 동리 전체가 군(軍)의 사유지처럼 보일 정도로 온통 군 위주로 짜여진 곳이었다. 휴전선이 바로 지척이라 그런지 검문 검색도 심했다.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바로 옆이 연대본부였는데 새벽만 되면 군가(軍歌)를 틀어대는 바람에 일찍 잠이 깼다. 가을만 되면 특수훈련이 시작되는데 그때는 학교마저도 군 작전 통제 지역에 들어갔다.

밤이면 얼마나 대포와 총을 쏘아대는지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추수가 끝나버린 논에서 얼굴에 검정칠을 한 군인이 튀어나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날 군 부대의 연대장이(중령)이 학교를 방문했다. 그가 내게 오더니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사병들이 선생님을 귀찮게 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더니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몇 달 뒤에는 중위 계급을 단 남자가 찾아와 혹시 권총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술을 마시고 저수지 근처에서 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후 그 중위가 권총을 찾았는지 못 찾아 징계를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부형 대부분이 농사꾼이거나 군인이었는데 그곳에서 얻어 듣는 이야기 중에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았다. 본처와 첩을 따로 두고 사는 남자도 있었다. 본처는 시부모의 박대를 참아가며 농사를 짓는데 첩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다방을 운영하며 남편과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아내가 집을 나가버려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남자도 많았다. 그곳에서는 처녀가 군인에게 시집가는 걸 군납한다고 표현했다. 또 정신연령이 제 나이보다 지나치게 낮거나 모자라 보이는 사람은 미실이라고 표현했다.

장교 부인들간의 서열도 엄격해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았다. 군인 부인들은 얼마나 대가 쎄고 씩씩한지 역시 군인부인다웠다. 그들은 아무리 힘든 일도 눈 한번 까딱 않고 해냈다.

가끔씩 부대 내에 연예인들의 위안 공연이 있을 때면 온 마을이 술렁였다. 아무리 토박이 주민이어도 부대에 들어가 구경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젊은 여자에 한해 들어 갈 수 있었는데 나도 그 점을 이용해 한번 들어가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읍내에 보안부대가 있었다. 간첩을 색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부대였다. 현지에서 생활하는 토박이는 물론 공무원이나 외지인들을 감시하는 기능도 했다. 한번은 내가 모 기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벌써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전방 지역답게 여관이나 다방 음식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하다 못해 술집 작부들의 자세한 신상명세서까지 꿰고 있었다. 어느날 연대장인 중령과 교장선생이 대화한 내용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읍내에 있는 술집 작부 이야기였다. 티켓다방에서 일하는 모양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감이고 술집 작부를 하는 모양은 서울의 명문여대 중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도 그만큼 신원이 확실해야 해야 했다.

늘 외지인들의 방문이 빈번한 곳임에도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저절로 신고가 되는 곳이었다. 밤에 개울가에 가면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밤새도록 얼마나 개구리가 울어대던지…….

나는 그 당시(1980년대) 반딧불을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았었다. 처음에는 동화에서 읽던 도깨비불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한번은 여교사 협의회에서 휴전선 철책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연대 본부에서 보낸 지프차를 타고 산길을 오르는데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5월이었는데 대암산에서는 흰눈이 펄펄 날렸다. 중간에 초소가 있어 들어갔는데 중령 두명이 앉아 손님을 접대한답시고 사병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명령했다.

커피가 나왔는데 프림도 넣지 않고 설탕만 뜸뿍 넣어 가지고 왔다. 중령이 미안한 듯 “짜식 커피 하나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말했다. 이윽고 철책선이 보이는 OP까지 왔는데 마침 안개가 끼어 앞을 볼 수 없었다.

날씨가 맑으면 금강산을 지척에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안개 사이로 멀리 뻔치볼이 보였는데 그곳은 6.25 당시 미군 사단 병력이 전사한 곳이라고 했다. OP 바로 앞에 대형 화면과 함께 “뛰면 오분!”이라는 팻말이 북쪽을 향해 나 있었다.

분단의 아픈 현실을 가장 지척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날만 밝으면 북한 병사들과도 대화가 가능한 곳이었다. 그곳을 구경하고 내려오는데 아는 사병을 만났다. 언젠가 내가 교무실에 있을 때 연대본부에서 심부름 온 사병이었다.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나를 보더니 아는 체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 험한 산길을 빨간 딱지 붙인 지뢰밭을 지나 다녀온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내가 대학 졸업하고 처음으로 근무한 그곳 초등학교 교사들은 모두 외지인들이었다. 대부분 본가가 춘천에 있고 혼자 관사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그때 나도 학교 내에 있는 관사(官舍)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지 숨이 탁탁 막힐 지경이었다. 나이도 나보다 20살 이상 많아 나를 아예 어린아이 취급했다.

나는 그 당시 20대 중반이었지만 정신연령은 초등학생 수준이었던 것 같다. 얼마나 바보같이 어리석고 미련했던지 직원들이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아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말을 알아 들을 정도가 되었을 때는 아무도 내가 듣는 데서는 농담을 못했다.

내가 하도 난리 치고 싫어했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가 없는 나는 휴일이면 이웃 학교 여교사들과 읍내를 쏘다니며 놀았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읍내는 돌아다녀 봐야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관청에 있는 여직원들과도 몇 번 어울렸는데 한번은 춘천에 있는 공무원 교육 현장에서였다. 누군가 다가와 아는 체를 하는데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이었다.

“혹시 ○○초등학교에 계시는 신 선생님 아니세요?”

“어! 그때 그… .”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교육이 끝나고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오는데 남면에 이르자, 자기 집으로 꼭 놀러오라며 몇 번이나 당부하는 것이었다. 시골 인심이라 도시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은 근무지를 옮겨가며 생활하는 사람들이기에 헤어짐이 체질화되어 있었다. 헤어짐에 있어 도대체 감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성격과도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있었다.

나 역시 정이 없고 무심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3년간을 보내고 떠나는데도 별리의 슬픔은 별로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잔정이 없는 성격이라 더 그러했던 것 같다. 3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곳인데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다.

떠나와서도 그리움 따위는 없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직장이었던 그곳을 떠나와서 소설가로 등단하기 이전까지 여러 직장을 다녔다. 한때는 일년에 한번씩 새로운 직장을 옮기는 게 꿈인 시절도 있었다. 소설 쓸 거리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직장을 여러번 옮길 만큼 능력도 없었고 전공을 버리고 편한 직장만 찾다보니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쓴뿌리만 잔뜩 쌓인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 알량한 직장을 다니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던지 사람이 뱀보다 더 싫어졌다.

그런데 난 직장을 다니면서 한번도 그것을 내 본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내 부업이고 내 본업은 소설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수틀리면 이 한심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말겠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전업작가가 되어 소설만 죽어라 써댈 날이 오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면서 객지에서 있었던 일을 수필 형식으로 써놓았다가 여러번 소설로 우려 먹었다.

만약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아마도 촌 여자가 되어 평범의 낙을 누렸을지는 몰라도 소설가는 못 되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 말했었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영원한 만남은 없는 것이라고. 유행가 가사에서도 말했듯이 인생은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이라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인생은 떠남의 연속이라고.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시로 떠나야 한다. 작게는 내 자신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주변 환경으로부터도 과감히 떠나야 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살면서 안정적인 때가 언제 있었던가 싶다. 항상 떠나야 한다고 자신을 부추겼고 조바심을 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러면서도 미래가 두려워 떠나기를 망설이고 지체한 순간이 더 많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이 얼마나 시간낭비였는지 알았다.
그곳을 떠날 때는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한 것도 따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지만 내 꿈을 이룰 수 잇었으니까.

어차피 인생사란 일분일초 이후의 일도 알 수 없는 것.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떠날 때 과감히 떠나는 것이 용기요 지혜이다. 나는 요즘도 인생에 있어 떠남의 소중함을 자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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