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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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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o_profile 신외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건 조회 1,678회 작성일 2006-09-02 10:19

본문

(단편) 혼돈
신외숙

  그는 늘 낯선 곳을 좋아한다.
  두려움과 분노가 숨을 거두고 방종이 꿈꾸는 곳. 고통을 잠시 뒤로 하고 자신을 직시하는 곳.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는 곳, 그곳은 낯선 객지이다. 낯설다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
 
그는 늘 자유를 원했다. 집착이란 그의 사전에 없었다. 그는 어디에서 건 지체하는 걸 싫어했다. 언제든지 떠날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살아갔다.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습성이 몸에 밴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왜 떠나는가.

  그는 말했다. 나는 늘 새로움을 찾아 떠난다. 나는 새롭지 않은 환경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 익숙한 것은 곧 지겨움이다. 나는 그 지겨움을 탈피하기 위해 늘 새로움을 선택한다. 새로움은 설레임과 기대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기대가 없다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독자들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직업은 무엇이오?
  혹시 백수? 떠돌이 장돌뱅이? 여행사 직원? 열차 승무원? 아님 고속버스 운전사? 그도 저도 아님 팔자 좋은 재벌 아들?

  네에 맞았습니다. 그 비슷한 것입니다. 그는 돈 많은 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 아무 부러움 없이 살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실패 앞에 백수가 되었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일류대학을 나오고서 일 년도 안 돼 발생한 일이었다. 온 가족의 기대를 꺾고  사법고시에 낙방한 것이다. 그것도 일차 합격자 명단에서 빠진 것이다. 낙담한 가족은 그에게 걸었던 기대만큼 더 큰 실망감을 나타냈다.

  "사법 고시는 물론이고 장차 장차관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큰소리쳤건만."

  그의 부친은 아예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 절망했다.

  "아니 어떻게 이차도 아닌 일차에서 떨어지냐 내참 동네 창피해서……."

  어머니의 부끄러움은 동네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한 달도 더 지속되었다. 그는 그 소리가 시끄러워 컴퓨터 게임에 빠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난데없이 핍박이 날아들었다.

  "나이 삼십이 다 되어가지고 고시는 떨어진 주제에 밤낮없이 뭔 게임이라냐 컴퓨터를 당장 뿌셔 버릴까보다."

  역정이 난 그의 부친은 그에게 종주먹을 들이대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만 해도 그는 부친의 무릎에 앉아서 밥을 먹었었다. 늦둥이를 본 부친은 막내아들을 우리 귀동이 귀동이하면서 귀애했었다. 귀애하는 만큼 기대도 커서 늘 입버릇처럼 판검사를 외우고 다녔다.

  "우리 막둥이는 영특한 게 꼭 제 할아버지를 닮았지. 내 선친께서는 나라에서 주는 장관 자리도 마다하고 꼿꼿하게 절개를 지키셨단다 매국노가 득시글대는 정권 하에서 녹을 먹기 싫다 그거셨지."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 같으면 사양 않고 했을 텐데."

  그 아쉬움이 컸던지 제일 기대 가는 막내아들에게 모든 명운을 걸었다. 모든 면에서 처음은 그 의미가 강하다. 의미가 강한 만큼 영향력은 갑절이나 크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단 한번도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그였다.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실패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었다. 생애 처음 낙방의 고배를 마신 그는 그대로 침몰했다.

  어느날 그는 가족이 잠든 틈을 타 집을 나왔다. 약간의 현찰과 신용카드를 들고서.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고속버스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각본에 있는 것처럼 그는 너무도 침착하고 평온했다. 남쪽 바다가 있는 고장으로 떠나면서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제부터 나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탈피한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다. 고속버스에 오르는데 어디선가 '차표 한 장'이라는 유행가 가락이 들려왔다. 차표 한장 손에 들고 떠나간다네…….

  송대관이 그의 등뒤에 대고 야유를 퍼붓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실패가 두려워 야반도주하는 패배자의 모습이 어스름 새벽녘에 자신에게서 묻어나는 것 같았다. 봄날, 아직은 찬 새벽공기를 뚫고 그의 떠남은 시작되었다. 반포를 떠난 고속버스는 판교를 지나자마자 나는 듯이 달렸다. 신도시 아파트와 푸른 벌판이 번갈아 지나갔다. 푸른 강물과 농촌 풍경도 정신없이 지나갔다. 지나온 세월도 휙휙 지나갔다.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우동 코너에서 김이 펄펄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쫄깃한 면발이 혀끝에 감겨들었다. 국물 맛도 일품이었다. 언젠가 대학에서 MT 떠날 때 동료들과 사먹던 때와는 또다른 맛이었다.

그때는 동료들과 더불어 온통 들뜬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약간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 볼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충전기는 손에 쥔 채 다음 휴게소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고속버스는 남쪽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달렸다.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길가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보였다. 막 봉우리를 틔운 목련도 보였다. 이어 읍내 거리가 나타났다. 음식점과 모텔 건물들, 구멍가게와 야트막한 산자락 뒤로 새파란 바다가 보였다.

 넘실대는 바다는 일렁이는 하얀 물결과 함께 그의 시야를 장악했다. 바다가 삼킬 듯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고기잡이하는 선척도 보였다. 멀리 등대도 눈에 들어왔다. 그 바다를 끼고서 버스는 한참을 달린 뒤 복잡한 시내로 접어들었다. 고층 빌딩이 보이고 화려한 상가가 밀집돼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 건물마다 길거리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음악도 들려왔다.

이윽고 버스가 승강장에 닿았다. 사람들은 긴 여정에서 오는 피곤을 한꺼번에 풀기라도 하듯 하품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가방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낯선 거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거리였다. 마음속에서 쾌감이 일었다. 해풍이 날아와 그의 코를 간질였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나오니 택시가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가려다 주변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돈을 아껴야 한다. 자의식이 그의 어깨를 에워쌌다. 그는 걸어가면서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 이게 어디로 갔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다음 순간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핸드폰을 버린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참! 그렇지. 그는 다시금 제정신이 들었다.

버스 정류소 옆에 전파상이 보였다. TV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 모델이 나와 온갖 섹시한 포즈를 취해가며 핸드폰을 선전하고 있었다. 눈길을 돌려 길 건너편을 바라보니 핸드폰 가게가 보였다. 그는 살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는 바닷가가 보이는 낯선 방에 들었다. 피서철이 아닌지라 객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가 객실 열쇠를 받아들자 모텔 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혼자십니까? 아님 누가 또 오실 건가요."

  "혼잡니다."

  그러자 직원의 눈빛이 불안하게 변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자살한 어느 남녀 이야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저 손님."

  계단을 오르는 그의 등뒤에 대고 직원이 다시 한번 확인차 물었다.

  "혹시 부르실 일이 있으시면 전화기나 벨을 이용해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방은 2층 맨 끝에 있었다. 더블 침대와 화장대 작은 옷장이 보였다. 그는 가방을 한쪽 구석에 던져 놓고는 침대에 누웠다.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대로 누워 한잠을 자고 일어났다. 창 밖을 내다보니 불빛 속에 바다가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 점점이 떠있는 불빛. 고기잡이 배인가. 그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밤바다를 구경했다. 갈매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갯내음과 함께 싸아한 바닷 바람이 몰려왔다. 배에서 꼬르락 소리가 났다. 그는 가방을 객실에 놔둔 채 밖으로 나왔다. 모텔 밖에는 크고 작은 음식점이 많았다. 대부분 술과 음식을 곁들여 파는 곳이었다. 지방이라 쌀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음식값이 비쌌다.

음식점마다 질펀한 농짓거리와 욕설이 물살 퍼지듯 넘쳐나고 있었다. 여자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바다 내음이 풍겨왔다. 밤바람을 타고 풀향기도 날아왔다. 마음이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마음을 추스르기엔 이미 절제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는 배고픈 것도 잊은 채 네온이 휘황한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천둥 치는 듯한 광란의 음악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작은 주점이었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그들은 모두 붉은색 계통의 옷을 입고 술을 입에 통째로 들이붓고 있었다. 여자들은 거의 반라의 차림으로 팔다리를 아예 내놓고 있었다. 남자들은 빨간색 나시에다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언 듯 보아도 그들은 학생 신분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장인 같지도 않아 보였다. 눈빛은 광기로 출렁였고 이상한 흥분으로 뜰 떠 무어라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술은 마셔도 마셔도 동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덥다며 마지막 남은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바닷가로 뛰어갔다. 그들 중 대부분은 물결 속에 몸을 던졌다. 남녀가 한 데 뒤엉켜 난데없는 부라보! 하는 외침을 던지고는.

  잠시 후 바다는 잠잠해졌다. 젊은이들의 함성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보이는 건 칠흙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는 혼자서 밤바다를 걸었다. 방파제 위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찬 바람이 몰려와 파도 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이미 무너진 마음 위로 정신이 산만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방파제 끝에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소주를 병째 들고 마시던 그녀는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널브러졌다.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꽤 미모의 여자였다. 그가 다가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이봐요 아가씨 정신 차려요."

  그가 여자의 몸을 거칠게 흔들며 말했다. 그때였다. 방파제 아래쪽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보였다. 건장한 청년 남자 서너 명이 급히 도로 쪽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체격으로 보아 그들은 운동 선수거나 조직 폭력배 같아 보였다. 여자는 널브러진 채 미동이 없었다. 마치 죽은 시체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여자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렇게 누워 있음 어떡해요?"

  그러다 그는 여자의 몸에서 이상한 감촉을 감지했다. 마치 나무 토막을 만지는 것 같은 뻣뻣한 느낌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바로 눈앞에 경찰 차량이 보였다. 차 문이 열리더니 형사로 보이는 육중한 체격의 남자가 내렸다. 어둠 속에 그것은 영화의 한 정면을 보는 듯한 이상한 착각을 일으켰다. 파도 소리와 어둠, 여자와 경찰 차량. 그리고 낯선 남자.

  그는 환상을 보듯 몽롱한 상태에 빠졌다. 차량에서 내린 남자가 그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 여자 옆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여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돋보기 같은 것을 꺼내 여자의 이곳 저곳을 살피더니 눈을 뒤집어 보기도 했다. 이어 수첩을 꺼내 뭔가 적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그에게 경찰서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왜죠?"

  "현장에 있던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이죠."

  목격자?

  그는 또다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피해자와 어떤 관계십니까?"

  "네? 피해자라뇨?"

  "이 여자 방금 전 죽었습니다. 원인이야 조사하면 곧 밝혀지겠지만…… 어쨌든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목격자시니까 일단 서까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경찰차에 올랐다. 여자가 죽다니…… 그렇다면 여자가 마신 건 술이 아니고 독극물이었단 말인가. 어쩐지 술을 마신 여자가 그 자리에서 널브러지더니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했다. 여자의 사체는 들것에 실려 차 안으로 옮겨졌다. 아마 과학수사 연구소에 옮겨 사인(死因)이 밝혀질 것이다. 그는 단지 피해자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 수사과에 옮겨졌다.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여자는 국내 굴지 재벌의 막내딸이었다. 혼자 여행을 왔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사체 부검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여자의 죽음은 자살인 거로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졌다. 그나 저나 경찰은 어쩌면 그토록 빨리 그녀의 죽음을 알 수 있었을까. 아무리 그녀가 재벌 딸이기로, 일부러 그 동태를 감시하지 않는 이상에야.

  "일단 신분증이나 주민증 좀 보여 주실까요?"

  어감이 좋지 않았다. 일단이라니…….

  그렇담 다음 단계가 또 있단 말인가. 그는 운전면허증을 내밀며 말했다.

  "마치 저를 피의자 취급하시는군요."

  "별 문제가 없다면 곧 나가시게 될 겁니다."

  형사는 면허증에 나와 있는 내용을 적더니 핸드폰 번호도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아뇨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피해자를 처음 본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보다도 방파제는 언제 갔습니까 그 때가 대략 몇 시쯤 되었죠."

  이건 아예 그를 용의자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가 술을 마시고 막 쓰러지던 시간 바로 그때입니다."

  "또다른 목격자는 없었습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도 그때 너무 당황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요."

  그는 투정하듯 말했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를 처음 봤을 때 말입니다.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던가요?"

  "아! 글쎄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알겠습니까, 방파제 끝에 여자가 보여 다가갔더
니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길래……."

  "뭔가 수작을 붙여 볼까 했는데 그냥 여자가 제 풀에 푹 죽어서 넘어졌다 그 말씀이죠?"

  형사는 뻔한 스토리라는 듯 말했다.

  "암튼 좀더 자세한 건 사인(死因)이 나와 봐야 할 것 같고 나중에라도 뭔가 생각나는 게 있다면 연락 주십시오, 일단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아참! 그런데 이곳엔 무슨 연고로……."

  "네에? 저요 고시에 낙방해서 여행 왔다가…… 그만 둡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정말이지 재수 없는 밤이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모텔 방에서 TV를 켜는데 지방 뉴스가 나왔다. 바로 어젯밤 방파제에서 있었던 자살 사건이었다. 피해자 여성은 국내 굴지의 재벌 막내딸이었다. 사인(死因)은 역시 독극물에 의한 자살이었다. 자살의 직접적인 동기는 심한 우울증이었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치정에 얽힌 남녀관계로 보는 견해도 강했다. 여자의 사체는 가족에 의해 처리되었고 시간이 흐르자 그 사건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일 주일간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그 도시에 머무는 동안 그는 빨간색 젊은이들과 매일같이 마주쳤다. 거리에서 바닷가에서 술집에서…….

  그리고 그가 방파제를 따라 산책할 때마다 육중한 체격의 남자들이 그림자같이 따라 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홀연히 그 도시를 떠나버렸다. 다음번에 그가 머문 곳은 강원도 골짜기였다. 소양호 호수를 끼고 북녘땅을 마주하는 곳. 그는 그곳에서 약 육 개월을 머물렀다. 작은 농가에서 농사일을 도와주고 숙식문제를 해결하면서 읍내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산골의 인심은 넉넉했고 그는 자유로웠다. 자유가 지나치다 어느날 문득 여자가 그리워졌다.

  산골에는 여자가 없었다. 다 도시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산골에는 노인네들뿐이었다. 젊은 부부가 이혼하고 버려둔 아이들만 올망졸망 있을 뿐이었다. 버려진 아이들은 조부모에 의해 길러졌다. 힘들게 농사일 해서 품팔고 걷어 먹이고 나면 남는 건 빚뿐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씩씩하게 잘 자랐다. 자연의 품속에서 모든 시름과 슬픔을 잊은 채로.

  그는 역시 이번에도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해 떠나는 방식을 취했다.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트렁크를 들고서 새벽 첫차를 탔다. 그가 탄 버스는 그를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거기서 배를 탔다. 안개가 잔뜩 낀 호수를 쾌속정 배를 타고 한시간이나 달려 이른 곳은 이름 그대로 호반의 도시였다. 거리가 깨끗하고 공기가 맑고 시원했다. 도심의 한 복판에 형성된 상가는 그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되었다. 어머니가 보따리 행상을 다닐 정도로 살림이 곤궁했었다. 그렇게 장사해서 번 돈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살아가는데 어느날 유산(遺産)이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숨겨두었던 재산을 임종 직전에 풀어놓았던 것이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부잣집 도련님 대접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두뇌는 영특했고 원하는 것은 언제든지 손아귀에 쥘 수가 있었다.

  그 대신 그는 부모의 기대감을 언제나 충족시켜 주어야했다. 호수로 둘러싸인 C시에서 그는 학원강사를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C시는 그에게 방종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듯했다. 그는 일 주일에 서너 번 학원에 나가 강의하는 것 말고는 무한정 혼돈에 싸였다.

 자유가 지나쳐 방종이 되더니 나중에는 무의미와 혼돈이 다가왔다. 혼돈, 그것은 얽매임이었다. 자유가 그 무언가에게 계속 침탈 당하고 있었다.
  침탈 당한 자유는 그를 무기력의 늪속으로 끌고 갔다. 연체된 카드 빚 액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버는 것은 한정돼 있는데 쓰는 것은 무한정이었다. 구속의 끈이 없으니까 몸과 마음이 풀어질 대로 풀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늘 새로운 장소에 있었다. 그것도 매번 낯선 여자와 함께.

  언젠가는 모텔에서 나오다 학원생의 학부모와 마주치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그는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서 있었다.

  여자 킬러. 연체된 카드빚도 그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 마침내 그 도시를 또다시 떠나고 말았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도시를 전전하고 살았다. 이상하게 그가 가는 곳마다 여자가 따랐다. 직업적인 전문 여성은 물론 앳된 처녀애들도 그를 보기만 해도 따랐다. 그는 마음 가는 곳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한동안 혼돈의 늪속에 빠지다 헤어나면 말할 수 없는 허무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곤고함이 그의 뇌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때쯤이면 그는 또다른 타지로 거처를 옮겼다. 마음에 중심이 없었다. 콜로이드 용액처럼 마구 분해되고 용해됐다. 한번은 동해가 보이는 도시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그 곳은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쪽빛 바다와 폭포가 굽이쳐 흐르는 산이 도시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닷바람과 산공기만으로도 이성(理性)이 감성 앞에 맥을 못 추고 흔들렸다.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는 이성(理性)을 거부하고 감성과 본능에만 충실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무한정 술을 마셨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점이고 길거리고 심지어 바닷가를 거닐면서도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고성방가와 추태가 도를 넘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환자 같아 보였다. 모두 꿈을 꾸는 듯 정신없이 헤매었다. 무수한 욕설과 함께 어둠속을 욕정과 뒤엉켰다.

  거짓과 위증과 몰락과 쾌락이 발끝마다 묻어났다.

  탈진된 정신과 육체가 카드빚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했다. 그들은 카드빚에 쫓겨 도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악마에게 저당 잡히고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이상하게 그 도시는 파산 선고자가 가는 곳마다 즐비했다.

그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거나 이혼한 케이스도 많았다. 개인 파산은 가정 파산으로 이어졌고 가정 파산은 정신 파산으로 결말이 났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시는 때에 따라 허무와 혼돈으로 광풍의 물결에 휩쓸렸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가 침몰 당한 것처럼 인생의 광풍에 휩쓸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만족을 찾아 헤맸지만 만족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쉽게 실증을 느꼈고 쾌락과 함께 침몰했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날 뿔뿔이 헤어졌다.

  방황과 혼돈의 세월이 그 앞에서 휙휙 지나갔다. 처음 서울을 떠날 때 반포를 빠져나온 고속버스가 판교를 지나자마자 신도시 아파트와 푸른 벌판이 푸른 강물과 함께 정신없이 지났던 것처럼. 그렇게 세월이 휙휙 지나갔다. 떠남이 일상이 되어 살아온 그의 지난날은 그에게 엄청난 세월의 공백을 가져다 주었다.

  그 공백 속에 불안이 슬며시 끼어 들었다. 안정이 그리웠다. 그는 안정을 찾아 또다시 헤매었다. 이번에는 낯선 도시가 아닌 대도시의 중앙이었다. 정상적인 삶속에 그가 찾지 못한 안정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날마다 상가가 밀집된 곳과 관공서앞을 지나며 그는 지난 세월을 후회했다. 건물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피 튀기는 경쟁과 살벌한 이전투구 앞에 아예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상가에서는 순간의 이익에 사활을 걸었고 관공서에서는 암투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모두의 이마에 성실의 땀방울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실패라는 적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의 현실 속에 위험의 요소는 곳곳에 숨어 있었지만 성공이라는 고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얼굴마다 비장한 각오가 묻어났다. 그러나 미소가 평화로운 미소가 만면에 흐르고 있었다. 열의에서 오는 소망의 미소였다. 내일을 두려워 않는 용기, 담대함이었다. 번잡한 시장통에는 삶의 철학이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소망의 메시지를 붙잡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시장 먹자 골목 한 귀퉁이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정지 먹은 카드가 주머니에 잡혔다. 아무리 마셔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간이 소주에 전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노인네가 보였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입은 조끼에는 빨간 글씨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그 글자를 쳐다보며 몽롱한 환상에 빠졌다. 그건 훨훨 타는 불길속에서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불길은 그의 하체를 태우고 가슴 부분까지 타올랐다. 그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의 죄목은 직무유기였다. 
  직무유기라니요? 그는 비명을 지르며 항변했다.
  내게 언제 책임져야 할 의무 같은 게 있기라도 했습니까. 직무유기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원하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웅웅거리는 잡음과 악령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불길은 이제 그의 뇌를 태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악!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새소리 음악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차츰 정신이 깨였다. 마지막 힘을 다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그를 잡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쓰러져 잠들면 어떡합니까, 댁이 어디신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쳐서 지쳐서……."

  그는 말하다 말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들것에 의해 응급차량에 옮겨졌다. 노숙자, 아니 행려병자가 되어 시립병원에 안치되었다. 몸에서 냄새가 진동해 아무도 그 곁에는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의료진에 의해 내려진 병명은 알코올성 간경변이었다. 간단한 신원조회가 이루어졌다. 그의 주머니에서 정지 먹은 카드가 나왔고 새까맣게 찌들은 자동차 면허증도 나왔다. 한시간쯤 지나자 그의 누이가 달려왔다.

  누이는 분노와 격정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누."

  "난 난 지쳤어 너무나 피곤해."

  "이제 그만 혼돈의 세월을 끝내버려라."

  "누나 어머니는?"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세월이 얼마냐 벌써 십 년이다."

  그는 머리를 감싸며 울부짖었다.

  "너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나중에는 막 울면서 후회하시더라, 공연히 고시에 목매달다 귀한 막내 아들 잃어버렸다고, 그러게 진작 그럴 것이지."

  누이는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니가 법대에 가는 것 반대했다. 넌 법관 체질이 아니라고 죄인들 상대하기에 넌 너무 심약하다고, 끝끝내 내 말 무시하더니…… 성경에 고난이 유익이란 말씀이 있어,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라."

  "그러기엔 난 너무 많이 돌아왔어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어."

  "이제부터라도 너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라, 너 좋아하는 그림을 다시 시작하든지. 병도 마음먹기에 따라 빨리 낫기도 하고 더하기도 한다더라."
  퇴원하던 날 누이는 엄중한 태도로 말했다.

  "술을 끊어야 병이 낫는다더라 그게 널 자유하게 할 거다. 집으로 가라 네가 거처하도록 다 준비해 놓았다. 진짜 참된 자유는 책임을 감당하는 데서 오는 거다. 이제부터 책임질 일을 찾아서 해라, 모든 건 네 몫으로 남게 될 거다."

  누이는 제법 철학적인 말을 늘어놓으며 손수 자동차를 운전해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제부터 잃어버린 네 의지를 찾아라."

  누이는 그에게 나무 십자가와 성경을 주고는 가버렸다. 집은 옛날과 똑같았다. 마치 그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모든 게 다 준비돼 있었다. 십 년이란 세월 차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네 혼자 힘으로 살아라, 아무의 도움도 기대하지 마라, 어차피 인생은 홀로서기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그러고 보니 지난 혼돈의 세월 동안 한번도 편안한 잠을 잔 것 같지 않았다. 평안과 자유, 자유가 심령속에 강물처럼 느껴졌다. 삶이 짐처럼 느껴지던 시절, 그래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새벽에 도망치듯 떠났던 집이 아니었던가. 자신을 잊고 싶어서 실패한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서 낯선 곳으로 숨어버리지 않았던가.

  며칠 후, 그는 잃어버렸던 의지를 찾아 거리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시내 한복판을 지나는데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가 아닌 여러명씩 몰려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일제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무한속도로 질주하는 폭주족들도 보였다. 검은색 런닝 셔츠를 입은 젊은이는 빨간색 민소매를 입은 여자를 뒤에 태우고 광풍처럼 내달렸다.

  조직 폭력배를 연상케 하는 건장한 청년들도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그들은 항상 떼로 움직였고 질서정연한 태도를 보였다. 고속버스 터미널은 떠나기 위한 젊은이들로 여전히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건 지하철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지하도에는 여전히 노숙자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입시학원은 재기를 노리는 어린 학생들이 모여 진지하게 삶을 카운트다운했다. 파업투쟁을 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조원들과 시장통에서도 긴박한 의지가 살아 있었다. 

  시장통을 걷던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모퉁이 선술집을 향하고 있었다. 지난날 마셨던 알코올 향기가 그의 뇌리 속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술에 의존해 살던 지난날이 아직도 몸 한구석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머물렀던 낯선 도시가 떠오른다. 그 도시에는 성벽처럼 높다란 담이 울타리처럼 쳐진 건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그도 그 건물 밑을 지날 때마다 심각한 두려움에 떨었다. 군사 정권 시절 많은 사람이 그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곳은 관공서는 물론 논밭과 주택까지 안개 속에 파묻혀 이상하게 두려움을 더했다. 그 도시에서 그는 밤마다 낚시질로 소일했다. 그때는 불면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 낚시질 할 생각이 났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것도 한밤중에 일어나 댓바람에 소주까지 마셔가며…… 그때 그는 뼈속 깊이 느껴오는 고통을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그 허무한 고통. 그는 자신에게 의미가 무엇인가 자꾸만 물었다. 의미…… 의미…… 나에게 의미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안식이 그리웠다. 그런데 지금 내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가. 그 허무와 고통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디미는 것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의식속에 환한 빛이 비쳐왔다. 광채가 그의 온몸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과거에 뒤엉킨 상처와 분노로 찢겨진 마음이 회복되면서 의지가…… 잃었던 의지가 살아나고 있었다.

  이렇게 멈출 수는 없다.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의지가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가던 길을 돌이켜 시장통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찾아 나섰다. 우선 카드빚부터 청산해야 했다. 급한 대로 막노동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신용을 되찾는 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신용을 잃는 건 전 재산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또 부모가 물려 준 재산을 지키는 건 자식의 도리이자 의무다. 그 의무를 찾아 행해야 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생활정보지를 읽으며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청년백수가 지천인 마당에 일거리를 찾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다 못해 건설직 일용 잡급직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나마 쉽지가 않았다. 건설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사실 사십이 가까운 나이에 직장생활도 전무하고 남 앞에서 기죽고 산 일도 없는 그였다. 방종을 위해 학원생들을 가르친 게 고작이었다.
  이젠 지식을 팔아 먹고살기엔 머리가 너무 녹슬었다. 몸을 움직여 먹고살자니 이 역시 경험이 전무했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장사를 하자니 밑천이 없었고 돈을 빌리자니 신용불량자였다.

살고 있는 집도 명의가 장남인 큰형 몫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큰형은 뉴질랜드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금명간 귀국해 재산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어느날 악마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내가 신용회복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마."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제발 내게 가르쳐 주시오."

  "장기(臟器)를 팔아라."

  "장기라니?"

  "네 콩팥이나 간을 팔란 말이다."

  "뭐 뭐라구?"

  "내가 장기밀매업자를 소개해 주마 콩팥 하나만 팔면 급한 대로 카드빚은 막을 수 있을 거다."

  악마는 장기(臟器)를 팔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루트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끔찍한 장면을 떠올렸다.

  사채업자가에게 돈을 빌려 쓴 여주인공이 폭력배에게 쫒기다 마침내 수술 침대 위에 눕는 이야기. 여주인공은 수술대에 누워 콩팥 하나를 떼어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옆구리에 수술 봉한 자국이 보인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검은 그림자에게 쫓기는 이야기…….

  그 공포 분위기가 점점 현실로 닥쳐오는 듯했다. 또다른 악마가 다가와 말했다.

  "가진 걸 모두 팔아 로또 복권을 사라."

  악마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 역전 일확천금을 노려라."

  "가진 것도 없거니와 그건 안 될 말이다."

  "그렇다면 바다이야기에 빠져라."

  사행성 오락 게임에 빠지라는 이야기였다.

  "안 될 말이다."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또다른 악마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죽어라."

  "어림없는 수작 마라."

  "그렇다면 네 의지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겠다."

  "웃기지 마라, 너는 이제 내 의지를 빼앗을 수 없다."

  그는 가슴속에서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악마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듯했으나 또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미 널 점령해 본 적이 있지, 넌 이미 나를 잘 알고 있을 거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왜냐구 나는 널 누구보다 잘 아니까. 이제부터 네 의지를 하나씩 거둬 갈 거다."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간 그의 내부는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두려움에는 힘과 능력이 있었다. 온몸이 탈진되면서 의식이 그 어떤 강한 힘에게 붙들려 옴쭉달쭉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별력이 떨어지면서 그는 한없이 침몰했다. 두려움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과거체험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의식의 사십 프로를 차지했다. 두 번 째는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절반을 차지했다. 실제 두려움은 단 십 프로였다. 그것도 악마의 속삭임에 의한 거짓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악마는 거짓된 정보를 그에게 주입하면서 그의 생각을 계속 조종했다. 불안도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계획된 순서처럼 혼미가 이어졌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술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막 집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약은 제때 잘 챙겨 먹고 있지."

  누이였다. 그는 술병을 제자리에 놓으며 간신히 말했다.

  "마음이 마음이……."

  "왜 또."

  "두려움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두려움은 대부분 거짓된 것이야 실제완 달라, 성경에「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
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느니라」란 말씀이 있어 그 말씀을 붙들어라."

  누이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술병을 들고서 거리로 나왔다.

  "술을 절대 끊어야 합니다. 여기서 더 이상 진행되었다간 캔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의사의 말이 귓전에서 살아났다. 그는 무의식 중 또다시 시장통 선술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그의 옆을 지나는데 이상한 향기가 났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향긋한 과일 향기도 같고. 그는 강한 이끌림에 의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노인네였다.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던 그 노인네였다. 노인네는 오늘도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시장통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짐짝 취급을 당하며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다.

  그는 선술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때 그의 눈에 이상한 환시현상이 일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나무 십자가를 지고 있었다. 니스칠을 한 번쩍번쩍한 십자가가 있는가 하면 패이고 곰팡이가 난 십자가도 있었다. 색깔도 가지가지였다. 붉은색 황금색 흰색…….

  그는 문득 자신의 등을 만져 보았다. 거칠고 딱딱한 나무가 손에 만져졌다. 있는 힘을 다해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람들 속에 파묻혔다. 그런데 힘이 약해질수록 안에서 생수와 같은 기운이 솟아났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희열이 마음 속을 감싸면서 담대한 의지가 생겨났다. 그건 믿음이었다. 그 믿음의  힘이 의와 평강으로 살아나면서 정직한 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두려움은 사랑의 힘에 쫓겨 어느새 물러나고 없었다. 

  불안과 혼미가 사라지면서 자유가 몰려왔다. 마음속에 안식이 임하면서 사랑의 기운이 뇌리 속에서 점차 살아났다.
  힘이 느껴졌다. 그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강한 능력의 힘이.
  골목길을 지나는데 젊은 남녀 한쌍이 보였다. 마악 잠에서 깨어난 듯 런닝셔츠의 남자가 여자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왜 또, 무슨 일이야?"

  여자는 쫙 달라붙는 민소매 티에 얼굴은 간절함으로 지쳐 있었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였다. 남자의 눈치를 보며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응 그냥…… 보고 싶어서."

  모양새를 보아 하니 실컷 데리고 놀다 버린 여자가 찾아와서 매달리는 것 같았다. 버림받은 여자는 온갖 자존심 무릅쓰고 수치심까지 뒤집어 쓴 채 남자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자니 지나간 혼돈의 세월이 생각났다. 늘 불안과 혼미뿐인 지난날. 쾌락과 방종이 뒤엉켜 불안을 부추기던…… 그 세월 속에 얽힌 수많은 여자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이 오히려 지금 그에게 안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낯섬, 방종, 부자유, 혼돈, 무의미, 두려움.

  그 모든 단어가 하나로 합치되면서 그에게 의미를 알게 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유의 의미를.

  돌아서는데 어느새 의기투합한 두 남녀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거지 동냥 주듯 여자 뒤를 따라 가면서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남자는 목을 뒤로 제키면서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들은 오늘밤을 어디서 지낼 것인가.

  어둠이 골목길을 휘몰아치면서 그들 뒤로 무서운 광란의 바람이 세차게 지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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