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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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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o_profile 신외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633회 작성일 2006-10-26 10:26

본문


(단편) 옛 꿈
신외숙

팔당을 지나 양수리로 가다 보면 능내라는 작은 동리가 보인다.
이전에는 능내역이라는 간이역이 있어 꽤 많은 승객이 타고 내렸던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 음식점들이 있고 별장 같은 집과 가지각색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밭과 산자락이 맞닿은 곳에선 군불을 지피는 모습도 보인다. 호박밭 채마밭, 역사(驛舍)주변엔 빨강 주홍 노랑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역사 뒤편으로 울창한 수풀과 청남색 기와 지붕이 보인다. 바로 그 앞에 철로를 밝히는 가로등불이 이색적인 풍경을 더하고 있다. 이제 열차는 그곳을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굳게 닫힌 역사는 이제 더 이상 열차가 정차하지 않으며 표를 팔지 않는다는 안내문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철로 주변엔 여전히 시골 역사의 낭만이 흐르고 있다. 이젠 열차 건널목을 지키는 지킴이도 없다. 청남색 기와집은 고고한 표정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부지런한 아낙네의 발길이 마당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청남색 기와 지붕 옆으로 벽돌색 건물이 보인다. 키가 큰 노오란 풀꽃이 그 앞을 지키고 있다. 느티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서있고 불꺼진 역사(驛舍)는 지나간 역사(歷史)를 생각나게 한다.
누가 저 역사(驛舍)를 거쳐갔을까.

토박이들 말고 외지인들은 무슨 목적으로 저 역사를 출입했을까. 주말임에도 인적이 드문 능내는 세월의 격차는 물론 경제한파마저 느끼게 한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주변 풍경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되돌려놓은 듯한 착각마저 일게 한다. 이상하리만치 차량이 뜸한 국도도 외로움을 불같이 일흐킨다.

능내에는 낯섬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쾌락이 아닌 두려움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적막감 때문일까. 이따금씩 지나는 시외버스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슬픔을 상기시킨다. 이전 시인(詩人)이 그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무한정의 자유와 낭만이 있었다. 살갗을 에이는 추위와 외로움, 꿈이 있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그곳을 지나면 언젠가 꼭 내려서 쉬어 가고 싶은 곳.
정신이 먼저 술에 취하는 곳.

오래 전 시인(詩人)은 그곳에 들러 슬픔으로 술을 마시고 떠났다. 철로변에 자신의 꿈을 묻어 두고서. 내 이 꿈을 찾아 다시 오리라. 그때 그는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잠시뿐이라는 단어를 남긴 채 버스를 타고 떠났다.
죽기 위해 산다.

팔당 강가를 내다보며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버스가 덕소를 지나 교문리를 지났고 상봉 버스터미널을 지날 때까지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휘경동의 큰 웨딩 타운을 지나 청량리에 이르자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밤거리 풍경이 그의 의식을 확 휘어잡았다. 버스에서 내려 거리를 지나는데 누군가 그의 옆구리를 툭 치고 지나며 말했다.

"아! 개떡 같은 세상이여,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나쁜 놈덜은 허
는 일마다 잘 되니 이게 워떻게 된 노릇이냐 말여."

그는 주먹을 허공에 흔들며 탄식을 했다. 아! 오늘도 세상은 패자들의 슬픔으로 가득하구나. 그러자 그 옆에 가던 친구가 말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걱정이여 죽을 땐 고생을 안 해야 하는데, 나는 그게 젤로 걱정이여."

아! 또 세상은 근심 걱정으로 뒤덮이는구나. 시인(詩人)은 발걸음을 아무데나 옮겼다. 하늘은 매연에 찌들어 건물에서 뿜어대는 네온과 결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이 수많은 말을 쏟아놓으며 거리를 지난다. 욕설과 함성, 웃음소리와 허튼 소리.
정치인을 꾸짖는 소리와 최고 권력자를 향한 원성도 서려 있다. 사업이 결딴나게 되었다고, 장사가 안 돼 개판 오분 전이라고, 자식놈들이 속을 썩여 죽을 지경이라고 사람들은 징징댄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다.
무관심.

시인은 청량리 로타리를 지나고 답십리 굴다리를 지난다. 청과물 시장이 옆으로 보인다. 588사창가도 보인다. 그 앞을 54번 시내버스가 매연을 내뿜으며 지난다.
그는 상가 이름을 읽으며 지난다. 기계 공구를 취급하는 가게가 이곳에는 유난히 많이 있다. 고장난 미싱을 고치는 곳과 여자들의 속옷 전문점, 간이 음식점과 약국도 보인다. 길거리에 쓰러져 잠든 걸인도 보인다. 한떼의 여자들과 싸우는 남자도 보인다. 열심히 상호를 읽으며 걷던 그의 발걸음이 굴다리 밑으로 들어가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죽음이 어느날 당신을 찾아온다면 어떤 자세로 맞을 것인가?

?자를 찍어 놓고 그는 잠시 고뇌한다. 머릿속에서 재빨리 의미라는 단어를 찾았다. 무엇을 족적으로 남길 것인가. 그는 또다시 단어를 찾았다. 그는 늘 죽음을 염두에 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늘 상상했다. 나는 인생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그러면서 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은 고난이라는 열차를 타고 절망의 계곡을 지나 죽음의 종착역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내심으로 말했다. 고난 위에 슬픔을 추가해야 한다. 인생은 온통 슬픔과 수고뿐이다.

'청량리엔 밤이 없다'

언젠가 썼던 문장이다. 그 옛날, 청량리 길을 걷다 보면 정말 청량리엔 밤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청량리는 낮보다 밤이 제격이다. 신학교 다닐 무렵 그는 신학생들과 더불어 답십리 굴다리에서 노방 전도를 한 적이 있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전단지를 나누어주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돌팔매질이 날아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젊은 혈기를 믿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했다.

"젊은것들이 미치려거든 올바르게나 미칠 것이지."

그에게 구정물을 퍼부으며 눈에 독기가 잔뜩 서린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에 악마 형상을 열 개쯤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험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예수가 밥 먹여 주냐 이 씨펄것들아."

그녀는 눈에 파란불이 일었다. 누구나 한눈에 그녀의 직업을 알아보리라, 여자의 성기를 도구로 장사하는 직업임을. 저 여자는 어쩌다 하고 많은 직업 중에서 저런 직업을 갖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멀리 돌아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전도지를 건네며 말했다.

"예수 믿으세요, 복받습니다."

"엣다 그 복 너나 많이 받아라."

여자는 그의 얼굴에다 대고 침을 퉤 뱉었다. 정말 생긴 모습 그대로 재수 없는 여자였다. 지옥 형상 같은 얼굴이 행동으로 재연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속에서 불길 이 치솟았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혈기 부리는 것은 마귀의 책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요.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면 감사하리라.

사도바울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바닥에 떨어진 전도지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난데없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이어 주먹질이 우박 쏟아지듯 쏟아졌다. 피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소용없었다. 뒤통수가 멍해지면서 그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사방이 적막했다. 멀리서 차량이 지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뻗어 바닥을 만져보니 차가운 인도블록이었다.

조금 있으려니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 보았다. 엉치뼈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누군가 뒤에서 그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친 모양이다. 그는 간신히 기어 가로수를 붙잡고 일어섰다. 이튿날 멍이 시퍼렇게 든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동료들은 말했다.

"그 포주는 그 일대에서도 포악하기로 소문난 여자라네, 그런데 자네가 용감하게 그
녀에게 대시를 했구만."

그러자 또다른 동료가 말했다.

"어쨌든 자네처럼 용기 있는 친구가 부러울 따름일세."

그의 애인이자 신실한 복음의 역군인 신해수가 말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징이라 생각해요, 감내하세요."

그러자 그 옆에 서있던 체격이 건장하고 잘생긴 주영식이 말했다. 그는 신학생들 사이에 영화배우로 통하고 있었다. 얼굴과 체격이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을 뺨칠 정도로 잘생겼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목회하게 되면 너무 잘생긴 외모 때문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길 거라고 미리 앞당겨 걱정했다.

"누가 보면 밤새 술 마시고 쌈박질한 줄 알겠소, 몸도 사려가며 하세요."

"그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면 언제 전도합니까?"

"그래도 말이죠ㅡ 거울 좀 보쇼, 폭력배들이 봤다면 형님! 하고 인사하겠소."

들을수록 화가 났다. 동료들은 모두 나서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해 보겠다고 온갖 수모를 다 견뎌가며 복음을 전하는데 정작 그 자리에 빠진 그는 같잖은 충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는 형씨는 왜 어제 도망친 거요?"

그는 일부러 형씨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어젯밤 폭력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엉치뼈가 아직도 얼얼했다. 얼굴도 화끈거리고 아팠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과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멍자국에다 눈알이 새빨간 게 꼭 토끼 눈알 같았다.

"나? 난 말요, 그 그러니까……."

그는 망설이다 간신히 말했다.

"그냥, 용기가 없으니까 아예 내빼버린 거지 뭐."

그 말에 동료들은 모두 배를 쥐고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니까 오히려 그 말이 위로
가 됐다. 주영식은 그때뿐만이 아니고 공식적인 행사에도 자주 빠졌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신학이 맞지 않았다. 목사인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들어왔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도로 뛰쳐나가고 만 케이스였다. 아니 너무도 잘생긴 그는 매번 여러 여자의 표적이 되는 바람에 풍기문란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여자 신학생들이 그만 보면 달려가 프로포즈를 하는 통에 다른 남자 신학생들은 저절로 기가 죽었다. 특히 못생긴 외모를 지닌 남자들은 그만 보면 슬슬 피해 다닐 정도였다.

"너는 아무래도 목회할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일찌감치 영화계로 진출해라."

주영식의 아버지의 친구이자 담당 교수인 오일환은 그에게 아예 대놓고 말했다.

"너 때문에 신학교 그만 둔 여학생이 한둘이 아니란 소문이다. 설마 부인하진 않겠지, 그러니 장래 유망한 여자 목회자를 위해서라도 넌 신학 포기하는 게 좋겠다."

교수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광나루에서 집이 있는 왕십리까지 걸으며 자신의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건 다름 아닌 아버지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는 아버지 목사의 서원기도가 그에게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만일 신학교를 그만 두고 세상길로 나선다면 그의 아버지는 실망하다 못해 무한정 금식기도에 돌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인은 그러한 그의 처지를 은근히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넉넉한 처지가 언제고 부러웠다. 교계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주목사는 털어도 먼지 한방울 안 날만큼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명 설교가로도 유명한 그는 무녀독남인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기로 서원한 다음부터 더 신실하고 후덕한 인품으로 변했다. 양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 목자로 변한 것이다.

살신성인.

그의 또다른 별호였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는 겉모습만 낳지 속은 못 낳는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훌륭하다 해서 자식까지 꼭 그렇게 되란 법은 없다. 주영식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그에 비하면 시인은 여러모로 처지가 빈약했다.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넘지 못할 태산 같은 일로 가득했다. 학기 때마다 등록금 마련을 못해 애를 태우고 학과 공부 따라 가기에도 힘이 벅찼다.

특히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그가 넘지 못할 산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도 영어가 가장 약했다. 이상하게 어학에는 자신이 없었다. 시험 때마다 밤을 세우고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해도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남들이 꺼리는 노방 전도도 자청해서 나갔고 설교문도 그 누구보다 잘 작성해 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대형교회에서 행정이나 설교에 주력하는 것을 성공의 타킷으로 삼는 것으로 반해 그는 낮고 소외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타킷으로 삼았다.

주영식에 비하면 그의 외모는 너무 형편없었다. 165센티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에다 얼굴도 조막만 하고 못생겼다. 목소리도 괄괄하여 도무지 목회자 스타일이 아니었다. 못 생기기로 말하자면 그는 신학교에서 으뜸이었다. 그에 비하면 그가 사랑하는 신해수는 미인이었다. 다른 여자 신학생에 비해 그녀는 성격도 활달하고 늘씬한 체격에다 얼굴도 예쁜 편에 속했다.

게다가 복음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 못지 않게 강했다. 철저한 불교 골수 집안에서 온갖 핍박 견뎌가며 믿느라 복음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던 것이다. 그녀 신해수에게는 오직 복음만이 친구요 애인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그녀의 눈에 시인이 포착된 것이다. 시인은 설교문 작성뿐 아니라 찬양시도 잘 써 화제가 됐다. 부활절 추수 감사절 때마다 그가 쓴 시가 채택이 돼 널리 암송되기도 했다.

그래서 붙여진 그의 또다른 이름이 시인이었다. 신해수는 그의 시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노방전도도 따라 나설 만큼 둘은 영적인 유대관계도 끈끈했다. 신해수는 오직 복음만을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았다. 노방전도할 때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거침없이 다가가 복음을 전했다. 길거리를 오가는 행인은 물론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 보험 외판원과 사창가의 여자들에게도 전했다. 그에 따르는 불이익과 수모도 잘 견뎠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만 생각하면 못 견딜 이유가 없다는 게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신학생들의 눈길은 이상하게도 곱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은근히 그녀를 멀리하기까지 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답십리 거리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매연과 상가에서 내뿜는 불빛과 청량리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옛날과 똑같았다. 시인은 그 거리를 걸으며 신해수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보다 한발 앞서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포주에게 머리를 쥐어뜯기고 펨프에게 얻어맞으며 피투성이가 되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다음날이면 얼굴에 피멍이 들어 나타났지만 누구 하나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그와 다른 점이었다. 그녀에게는 동료라는 의식이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시인이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교내에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에 대한 악의에 찬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사탄의 공작쯤으로 취급했다.

어느 비오는 가을날이었다. 시인은 우산도 없이 영등포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비오는 날의 거리는 이상하게 처량 맞았다. 좌판을 벌여놓은 노점상들도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외로움만 거리에 남았다. 사람들은 마치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 거리를 바삐 걸어갔다. 빗소리를 타고 유행가 가락이 들려왔다. 슬픔이 낙엽되어 흐른다는 흔해빠진 가사가 무도장 불빛과 함께 들려왔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활기가 흐르던 시절이었다. 영등포 역사 옆에는 대형 백화점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철골 구조물이 비를 맞고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밑을 수많은 발걸음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발걸음은 시인의 마음에 의문을 갖게 했다.
저들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저들의 발걸음이 끝나는 곳은 어디일까. 저들은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까. 무엇을 위해 저리도 바삐 움직이며 사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삶을 결단하며 어디에서 참 만족을 구하며 살아가는 걸까.

발걸음은 길을 찾아 헤맨다. 그중 많은 발걸음은 미로를 헤매고, 길을 찾지 못한 발걸음은 가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아예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발걸음은 암암리에 말한다. 시인은 그중 한 발걸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구두 발소리로 보아 그건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홀린 듯이 여자 구둣발만 쳐다보며 따라갔다. 여자는 잘록한 허리를 흔들며 지하도 계단을 지나 음식점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러더니 의류 상가를 지나 호프집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그곳에서 이상한 빛이 비쳐왔다. 가까이 가 보니 유리 케이스에 흰 나신(裸身)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가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자 여자는 보란듯이 가슴을 확 열어 제켰다.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의 나신이었다. 희고 풍만한 가슴과 탄력 있는 다리가 그의 시야를 덮쳐왔다. 그는 꿈을 꾸는 듯 잠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때마침 나타난 여자의 손길에 의해 그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화장대와 침대가 놓인 아주 조그만 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이성(理性)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이성뿐만이 아니었다. 석고처럼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여자의 얼굴이 악마의 화신으로 변해 자신을 내려다보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었다. 짙은 화장을 떡칠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자세히 보니 신해수가 아닌가.

세상에…….

그는 온몸이 경직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제서야 동료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신해수의 뺨을 후려칠 것처럼 노려보았다.

"어떻게 니가 니가……."

신해수 역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럼 다른 아가씰 불러 드릴까요?"

그는 너무 기가 막혀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자리를 뛰쳐 나오고 말았다. 신해수의 태도가 너무도 뻔뻔스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두 얼굴을 하고 자신을 깜쪽같이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사탄의 자식 같으니…… 입에서 저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녀의 모든 행동이 위선으로 보였다. 왜 신학생 동료들이 그녀를 그토록 경원시 했으며 냉철하게 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에게 자꾸만 설득하고 있었다.
아닐 거야. 분명 잘못 보았을 거야. 내가 뭔가 착각한 게 틀림없어. 내일 만나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어 보아야지. 그래 틀림없이 무슨 착오가 있을 거야. 비슷한 얼굴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신해수가 틀림없었다. 그녀 역시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지 않았던가. 내가 너무 놀라니까 다른 아가씨를 불러주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 모든 걸 따지기에 앞서 그는 너무 충격이 컸다. 신해수가 사창굴에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곳에 발걸음을 디밀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 광경을 보았을 신(神)의 눈이 두려웠다. 또 신(神)의 의지를 배반한 자신의 행동과 신해수의 태도가 너무도 파렴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신해수는 신(神)의 이름을 부끄럽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 참담한 부끄러움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그는 그 치욕스런 감정 앞에 무릎을 꿇고 목놓아 울었다. 비록 남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 살았을망정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자신이 아니었던가. 성경에 나오는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래도 양심에 심한 가책 받을 일은 안 하고 산 그였다. 그런데 어쩌다 내가 사창굴에 발을 들여놓았단 말인가.

그나 저나 이제 신해수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그래도 오랫동안 교분을 나누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믿음의 동역자이자 그가 최초로 사랑한 여자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신을 향한 믿음 이외의 또 하나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지고 나자 그는 너무 절망스러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남자들은 사창굴에 가 온갖 죄를 다 지으면서 그런 여자들을 또한 경멸하고 죄악시하죠,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율배반적인 행동인가요."

언젠가 신해수가 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그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그녀의 신앙의지에 탄복했다. 누구나 높아지기 원한다. 낮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서로 겸손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겸손을 가장한 위선만 부릴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해수의 신앙인격은 얼마나 고결한 것이었나.

시인은 신해수의 얼굴을 다시 대한다는 게 너무 두려웠다. 자신이 사창굴에 찾아들었다는 사실을 신해수가 알았으니 서로 서로 부끄럽게 되었다. 이튿날 신해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연상되면서 속이 바작바작 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길래 나타나지 않는 걸까. 그가 알기엔 신해수는 단 한번도 결석한 일이 없었다. 강의 시간에도 제일 먼저 나타나 앞자리를 차지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상한 건 그녀의 부재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신해수의 부재가 꼭 자신과 연관된 것 같아 더 조바심이 탔다. 혹시 나 때문에? 불길한 예감은 그의 뇌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불길하면 불길할수록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날 있었던 일들이 꼭 꿈속처럼 여겨졌다. 그래 우리 둘이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야. 다신 그런 일이 없다면 괜찮은 거야.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범죄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가.


뭐 내가 그녀와 관계한 것도 아니고, 또 나는 아직까지 동정(童貞)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다지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해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가 죽다니…….

그는 한동안 정신이 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그녀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인데 그녀가 죽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의 하나님은 어쩌자고……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신(神)을 원망하고 말았다. 당혹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배반과 모순. 위선과 가식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것은 슬픔과는 전혀 별개인 이제까지 그가 느껴보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었다. 그 미묘함 속에 안도감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타인의 죽음 앞에 안도감을 느끼다니, 세상에 이런 악마적인 기운이 내 안에 있다니…… 그는 스스로 아연실색했다. 신해수, 그녀는 한 때 자신과 뜻을 같이 했던 영적 동반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막상 위기의 절정에 이르자 자신 안의 악한 실체가 스스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어깨를 같이 하고 걸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외모로만 본다면 넘칠 만큼 과분한 상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비오는 날 사창굴에서 그녀를 만난 다음부터 감정이 백 팔십 도 돌아서 버린 것이다. 교리의 기본정신인 용서와 긍휼을 잃어버린 이율배반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신(神)을 향한 배반 심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건 엄청난 불신앙이었다.

동료들은 신해수의 시체가 안치돼 있는 대학병원 영안실로 떠나면서 그에게도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그 요구를 거부했다.

"왜 그래? 살았을 때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온갖 우애를 다 과시하더니."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간신히 말했다.

"난 난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어, 그녀가 죽었다는 걸."

그는 말해 놓고 나서 자신을 향해 철퇴를 가했다. 이 위선자. 파렴치범아 뭐?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가슴에 손을 대고 말해봐라. 그게 어디 니 진실인가고. 그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휩싸이면서도 끝끝내 아니라고 자신에게 우겼다.
언제 나타났는지 주영식도 말했다.

"뭐 충격이 큰것까진 이해가 가는데 그래도 가봐야 될 것 아냐, 이담에 천국에서 만나면 뭐라고 할 건데. 해수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그래 그건 영식이 말이 맞아, 가서 실제로 죽음을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 거야."

그러나 그의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영안실에 가서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면 더 큰 혼란이 올 것 같았다. 그는 입관예배는 물론 발인예배 때도 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고인의 가족으로 참석한 사람은 부모와 여동생뿐이라는 소식이었다. 그 삼사 일 동안 그는 극심한 내부의 갈등을 겪었다. 두려웠다. 비록 유명을 달리하긴 했어도 그녀는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을 몰고 왔다.

신해수가 사라져 버린 교정은 더 쓸쓸하고 휑댕그래했다. 그녀의 부재는 곧 역동성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나서서 노방전도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 밤 열리는 기도회에도 참석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표면적인 분위기가 바뀌었는데도 그 이유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가끔씩 시인의 반응을 살폈다.

표리부동. 외식하는 바리새인.

겉으로 말은 안 해도 그들은 속으로 힐문할 것이다. 위선자, 파렴치범. 애인이라고 좋아라 따라 다닐 때는 언제고― 그 애인이 죽었는데도 어쩌면 저리도 멀쩡할까. 나쁜놈. 그들은 시인의 감정상태를 체크하며 돌아서면 야유하고 경멸할 것이다.

어느날인가부터 그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주택가 골목 포장마차에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했다. 부끄러웠다. 도저히 부끄러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도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도감과 부끄러움은 숨바꼭질하듯 그의 감정을 조정했다. 그는 그 숨막히는 감정의 이중구조 앞에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틸 힘이 없었다.

마음을 술에 의지하면서 그는 점점 시들시들 야위어 갔다. 일부러 학교 강의를 빼먹은 날, 그는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한 채 영등포 거리를 걷고 있었다.
겨울비가 차갑게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추위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비는 곧 진눈깨비로 변했다. 바닥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술에 억병으로 취한 그는 조금도 무서울 게 없었다. 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지 알 듯했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어 보이니 그래서 술을 마시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발걸음을 의류상가가 보이는 호프집으로 옮겼다.

무의식중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로등불을 바라보았다. 진눈깨비가 미끄럼을 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싸아한 그리움이 가슴속으로 몰려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데 골목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절로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하는데 하얀 유리 케이스가 보였다. 여자의 흰 나신이…….
아아악!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돌아서다 그만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모양을 보던 행인들이 웃다가 자신도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서야 술이 확 깨면서 정신이 들었다.
그만 두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자신에게 말했다. 거리는 진눈깨비가 쌓여 지저분했다. 바닥이 유리알을 깔아 놓은 것처럼 미끄러웠다. 어릴 때 빙판길을 썰매를 타고 달리던 기억이 났다. 그때를 생각하며 미끄럼을 타며 걸어가는데 마주 오는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남자는 기골이 장대하고 한눈에 보기에도 미남자였다.

"뭐야 이거?"

그는 일부러 위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라렸다.

"아니 시인 아냐?"

"어! 당신 주윤발."

그는 엉겹결에 주영식의 애칭을 부르고 말았다. 그 역시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럴지라도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외모가 당장 눈에 띄었다. 영화배우란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기막힌 해후였다. 진눈깨비 내리는 겨울날 두 신학생이 술에 잔뜩 취한 채 영등포 거리에서 만나다니. 그들은 모두 낄낄대고 웃었다.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영등포 네거리를 걸었다. 로타리에 이르자 주영식은 쌍두마차 무도장이 보이는 쪽으로 취한 걸음으로 마구 달려갔다. 시인은 오던 길을 돌이켜 영등포 역사 쪽으로 걸어갔다.

한 달 뒤 휴학계를 내기 위해 학교에 들른 시인은 주영식이 자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학생 동료들은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전하면서 너도 할 거냐고 물었다. 신학교에서 자퇴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굳은 결단으로 신학교에 들어왔다가 스스로 회의감에 사로잡혀 그만 두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신학교를 졸업했다 해서 모두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시인과 주영식. 그들도 그중의 일부가 되어 신학교를 도중 하차했다. 신학교 교문을 나서는 순간 시인은 엄청난 방종의 물결에 휩싸였다.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이 그의 뇌리를 파도처럼 엄습했다. 그는 당장 청량리로 달려가 대낮부터 추위와 함께낮술에 취했다. 언젠가 신해수와 함께 답십리 굴다리에서 노방전도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똑같이 노방전도를 해도 시인에게는 적대적인 반면 신해수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어쩌다 악질적인 포주를 만나 곤욕을 치르는 것 외에는 신해수는 대체로 복음을 잘 증거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내미는 전도지를 받아 들고는 읽으며 길을 갔고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미소짓는 행인도 있었다. 외모가 그만큼 중요했다. 그 신해수의 모습이 술잔에 어른거렸다.

젠장할. 그는 자신도 모르게 푸념하듯 말했다. 마지막 술잔을 입에 털어 넣은 그는 청량리 시장을 빠져나와 답십리 굴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의 야유하는 소리가 귀에 왁자하니 들려왔다. 어디선가 또다시 싸움판이 벌어진 모양이다. 노점상들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고 굴다리에 이르자 어느새 눈물을 흐르고 있었다. 그리움이 속에서 꾸역꾸역 치밀어 올랐다. 슬픔도 또아리를 틀고 일어났다.

그는 길 한복판에 서서 큰소리로 울었다.

해수야. 해수야.

사람들은 길을 지나다가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욱 소리 높여 울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칼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후회와 연민의 감정도 가슴을 후벼파고 지나갔다. 그녀의 체취가 바람결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때는 그녀가 너무도 자랑스러웠었다. 미인인데다 당당하고 용기있고 지혜로운 여자가 그녀였다. 목회자로도 사모로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그녀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래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혹 내가 그 순간 눈이 잘못돼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어. 그런 건 둘째 치고라도 이젠 너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이냐.

가슴이 텅 비다 못해 뻥 뚫려버린 느낌이었다. 거리는 온통 얼어붙어 가슴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무릎이 덜덜 떨렸다. 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악한 정체를 깨달았다. 사도바울이 말이 떠올랐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리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라.」

생각할수록 자신이 괘씸했다. 너무 가증스러웠다. 그래, 신학교를 그만 둔 건 잘한 일이야, 아암. 나같은 위선자가 신(神)의 의지를 담당하다니 그건 말도 안 돼. 잘 내린 처사였어.

그는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한참 뛰다 보니 어느새 버스정류장이었다. 마주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무조건 올라탔다. 눈물 범벅이 되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버스가 중량교를 지나고 있었다. 추위에 옷깃을 여민 시민들이 밤거리를 종종걸음 치며 지나고 있었다. 상봉동 시외버스터미널에 이르러 버스는 많은 승객을 토해 놓고 망우리를 향해 기치를 올렸다.

건물마다 내뿜는 불빛이 스산한 가슴을 더욱 외롭게 했다. 겨울 밤바람은 가슴마저 시리게 하는지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움켜쥐고 바삐 걸어갔다. 혼자라는 사실이 가슴 저리도록 느껴졌다.
이제부터 난 무위야.
하릴없는 백수가 된 거라구.

그는 혼자 탄식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한참 후 일어나니 버스가 팔당 근처를 달리고 있었다. 검은 강물이 가슴속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버스가 S자로 휘어진 도로를 지나 내리막길로 내달았다. 불빛이 비쳐왔다. 음식점에서 내뿜는 불빛이었다. 왼쪽으로 천주교 공원묘지가 보였다. 사람들이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승객 두명이 하차했다. 그는 엉겹결에 따라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 뒤를 따라 걷는데 오른쪽에 역사(驛舍)가 보였다. 능내역이었다. 소규모의 간이역이었다. 주변에 앙상한 겨울 수풀이 눈에 쌓인 채 시야에 들어왔다. 빈 들판에서 눈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쾌감으로 전해져왔다. 음식점 건물들 사이로 모텔이 보였다. 모텔에서 뿜어져 내리는 불빛이 당장 음욕을 부추겼다. 그는 무심코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깜짝 놀랐다. 모텔 건물로 들어가는 젊은 두 남녀 때문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수려한 얼굴이…… 아무리 봐도 그는 주영식이 틀림없었다. 여자는 아예 그의 가슴에 폭 파묻힌 채 안겨 있었다. 주영식은 여자의 가는 허리를 한손으로 껴안더니 모텔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서 열쇠를 받아 쥔 주영식이 고개를 돌려 여자를 안았다. 여자가 남자의 목을 껴안고 늘어졌다. 남자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는데 이쪽으로 여자의 옆 얼굴이 보였다.

순간 시인의 숨은 일시에 멈추는 듯했다. 여자의 얼굴이 신해수와 흡사했다. 갸름하고 오뚝한 콧날이 그녀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확인하려는 순간 그들은 객실로 사라진 뒤였다. 그건 흡사 무슨 환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몽롱하면서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착시현상인지도 몰랐다.
내가 헛것을 본 모양이야.

해수가 내 마음속에 이렇게 깊게 자리잡고 있을 줄이야.

돌아서면서 그는 깊게 탄식했다. 그날 밤 그는 역사(驛舍)에 엎드려 잠을 잤다. 새벽 일찍 기차를 타고 떠나기 위해서였다. 날은 춥고 배도 고팠다. 그러나 입맛은 당기지 않았다. 긴 나무 의자에 누워 토끼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역사 안으로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려는 직장인들이었다. 순간 심한 자괴감이 들면서 백수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직 일곱 시도 채 안 된 이른 시각이었다.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주변에 인가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다 나타난 것일까. 그들은 분명 외지인들 같았다. 아무리 봐도 현지인들 같지 않았다. 세련된 옷차림과 긴장된 표정이 그것도 그들은 모두 쌍쌍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디에 있다 나온 걸까. 그러고 보니 그들은 모두 사련(邪戀)의 주인공들 같았다.

누구에게 들킬 새라 그들은 발걸음을 서둘러 역사 안으로 옮겼다. 두 손을 꼭 그러쥔 채로. 능내에서 서울까지는 채 삼십 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기차가 아닌 자동차로 가도 러시아워만 아니면 삼사십 분이면 간다. 그러나 출근시간 때는 다르다. 그래서 저들은 출근 시간 때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국도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왔다.

간밤엔 몰랐는데 사방이 눈천지였다. 겨울 내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산과 들이 온통 눈천지를 이루면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눈부시다는 말이 꼭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시외버스가 지나면서 매연을 내뿜었다. 긴 자동차의 행렬 속에 끼어 들기를 시도하는 승용차가 보였다. 검은색 그랜저였다. 선팅을 해서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그 안에는 분명 젊은 남녀가 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리하게 끼어들기를 시도하면서 자꾸만 클랙슨을 눌러대고 있었다.

좀처럼 틈이 안 나자 승용차 운전자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손짓을 했다. 좀 양보해 달라는 표시였다. 그 광경을 무심코 바라보던 시인은 또다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주영식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옆에 앉아 있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상기된 표정이…… 그녀는 신해수였다.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죽었다던 신해수가 어떻게 주영식과 한 차에 타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어젯밤 본 그 장면은 정녕 현실이었단 말인가. 모텔을 올라가던 그 젊은 두 남녀가 바로 저들?

그는 갑자기 의식에 큰 혼란이 왔다. 현실감각에 큰 이상이 발생한 것 같았다. 도대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신해수가 어떻게 주영식과 함께 있는가 말이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그녀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제 2의 예수? 이건 분명 꿈일 거야. 아님 내가 잘못 보았거나.

그의 발걸음은 그들이 탄 승용차로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 교통 체증이 풀리면서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영식이 엑셀을 힘껏 밟으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는데 짧게 아주 짧게 그와 시선이 마주쳤던 것 같다. 주영식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안에 탄 여자는 신해수일 것이다. 그는 동기들에게 전화를 걸어 주영식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들어봐야 뻔했다. 탕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을.

그는 그곳에서 삼 년하고도 만 석 달을 지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무한정 꿈을 꾸었다. 날마다 능내역을 바라보며 뜻없는 낭만을 꿈꾸었다. 신학기 등록금으로 마련해 두었던 돈으로 월세방을 얻었다. 돈이 필요할 때는 농사일을 거들며 품을 팔았고 과거의 아픔이 떠오를 때면 밤을 세워 글을 썼다. 물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양심의 가책으로 전해 올 때면 후회와 함께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댔다.

겨울이면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와 외로움과 싸웠고 봄이면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며 무능감에 휩싸였다. 여름이면 더위와 싸우느라 숨겨를 틈조차 없었고 가을이면 또다시 떠나기 위해 채비를 서두르느라 바빴다.

때로는 과거의 기억과도 무수히 싸웠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5-6년 간을 지방에 있는 공단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생산직 라인이었지만 보수는 꽤 쏠쏠했다. 열심히 벌어 고향에 송금했다. 그 돈은 아버지가 생전에 노름빚으로 저당 잡혔던 논밭을 되찾는 데 모두 들어갔다. 평생을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낸 선친은 죽어서도 가족들에게 짐을 안겼다. 그는 어머니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심했다.
난 나의 의지를 신(神)께 맡기리라.

결코 술이나 노름에 내 마음이나 의지를 맡기지 않으리라. 나이 삼십이 넘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소원이었다. 너만큼은 네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말고 네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라. 무엇보다도 낮고 소외된 인생들을 향해 네 목회 인생을 걸어라. 결혼도 그 다음의 일이다. 어머니는 그의 목회 인생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였다. 아들의 인생을 신께 맡긴 어머니는 정작 자신의 인생은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었다. 어머니의 소원이니까 당연히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남편에 대한 한을 아들로 대신하려는 그 간단한 이치를 그는 당연지사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새 그에게 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신해수가 근본적인 이유였는지 모른다. 아니다. 아니다.

그는 자꾸만 부정을 되풀이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중요할 뿐이다. 신학을 중도포기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신을 떠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성경적 의미로 그는 탕자가 된 것이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모텔과 국도를 오가며 수없이 살폈다. 또다시 주영식과 신해수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 미지의 확신은 그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그 확신은 엄청난 상상력을 부풀렸고 그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꿈속에서 날마다 신해수를 만났다. 그녀에게 무언가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신해수는 냉랭하게 돌아서서 주영식에게로 달려갔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그는 낙망하고 절망했다. 현실과 꿈이 뒤엉키면서 그는 점점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신해수는 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를 조종했다. 그는 하루종일 부지불식간에 신해수의 생각에 골몰했다. 농가에서 막일을 거들 때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한잔 술을 마실 때도 신해수는 항상 그의 가슴속에 있었다. 글을 쓸 때도 그녀는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녀가 살아서 그에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현실감각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점점 술독에 빠져드는 순간이 많아졌다. 가끔씩 그는 자신의 무의식을 반추하며 말했다.
그날 내가 본 것은 환상일 거야, 착각일 거라구.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나타날 수가 있겠어, 그녀는 분명 죽었고 이건 내가 꾸며낸 환상일지도 몰라. 그녀가 죽고 나니까 마음이 허전해져서 내가 잠깐 헛것을 본 거야. 그렇지 그럴 거야. 그런데 왜 난 이곳에 머물러 있는 걸까. 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는 걸까. 언젠가처럼 주영식과 그녀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원점을 맴돌고 있었다. 마음을 아무리 고쳐먹어도 생각은 여전히 신해수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곳을 떠나야 해. 그래야만 그녀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어느날 그는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급작스럽게 내린 결정이었다. 쓰던 물건들을 모두 놔둔 채 그는 몸만 빠져 나왔다.

떠나면서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내 이곳에 내 꿈을 묻고 간다. 그 꿈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이 곳에 들러 반드시 내 꿈을 확인하리라.
그리고 슬픔과 함께 엄청난 술을 마셨다. 마치 술과 원수 진 사람처럼.

황토 흙길에 이슬이 내려 촉촉한 아침이었다. 어! 이상하다. 어젯밤은 겨울비가 내려 길이 온통 미끄러웠는데. 하룻밤 사이에 겨울이 봄으로 바뀌어 버린 걸까. 국도를 바라보니 차량이 나는 듯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주변에 파릇한 새싹이 보였다. 봄기운이 당장 그의 허전한 마음을 휘어잡았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고향으로 가기엔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의 노여운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 목사 만들겠다고 험한 농사일에 찌들어 살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성직자의 길을 버리고 떠난 아들을 향해 얼마나 가슴을 칠 것인가. 그보다도 나는 실종된 나의 인생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생각해 보니 나이가 어느새 삼십 중반을 달리고 있었다.

능내를 떠난 그는 한동안 여러 도시를 떠다니며 살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일거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눈높이만 낮춘다면 돈벌이는 얼마든지 있었기에 생활에 불편은 없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마음속에서 불길같이 치솟는 것이 있었다. 그건 분명 욕구였다. 그런데 그 욕구의 정체를 모르겠는 것이다. 허전함과 치욕스러움, 무의미와 눈물.
그는 매일 저녁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때마다 술병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면서 죽은 선친이 떠올랐다. 노름 중독과 술중독.

그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그토록 몸부림쳤었는데. 술에 빠질지언정 그는 결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 한번도 단 한번도 그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죄책감이 마음속에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신해수에 대한 아픔과 후회라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후회는 과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촉구했다. 이제부터라고 제대로 된 인생을 살자. 그거야말로 후회에 대한 가장 정확한 보답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내 옛꿈을 찾자.

풀향기가 온 동리를 뒤덮던 어느 봄날이었다. 집 골목길을 빠져 나와 시장통을 지나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그 얼굴이 노점에서 생선을 고르고 있었다. 큰키에 날씬한 체격을 한 미모의 여자였다.
신해수다.

그의 의식에 불이 켜졌다.
신해수가 틀림없었다. 신해수는 배가 잔뜩 부른 모습이었다. 임신 8개월쯤 되었지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평상시의 그녀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여자의 키는 170센티를 상회하고 있었다.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는 세월의 공간을 뛰어 넘어 당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해수야."

그는 여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꼭 꿈속 같았다. 반가움이 가슴속으로 밀물처럼 몰려왔다.

"누구세요?"

여자가 뜬금없는 눈길로 물었다.

"나 나 시인이야, 이정명 시인."

"네?"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 언니 애인이셨다는 그 시인……."

"언니?"

아! 그러고 보니 얼굴 생김새가 약간 달랐다. 키도 신해수보다 훨씬 크고 얼굴형이 신해수에 비해 약간 둥그스래했다. 가슴이 철렁하면서 과거와 현실이 한꺼번에 인식되었다.

"전 해수 언니의 동생 해연이에요, 그런데 왜 언니 장례식에는 안 오신 거예요?"

그녀는 사오 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신해수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갑자기 그의 뇌리 속에 번쩍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능내 능내였다. 주영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때 모텔과 국도변에서 보았던 그들이 바로? 주영식과 신해연?
신학교 다닐 때 신해수에 관해 떠돌던 악소문도 생각났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그 소문의 근원지? 영등포 사창굴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바로? 그 모든 궁금증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그는 저절로 여자의 부른 배에 눈길이 갔다.

"혹시 능내에서…… 아니 영등포……."

"네?"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냉랭해지는가 싶더니 태도가 돌변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여자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그럴지언정 결코 진실을 말할 것 같진 않았다.

"저 죽음에 대한 확실한 대비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느닷없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네?"

여자는 여전히 당황한 빛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언니를 많이 사랑하셨나봐요."

"저, 그러니까…… 해수와 나는……."

그는 자꾸만 말을 더듬거렸다.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탕자의 길을 걷고 계시다면 속히 회개하세요, 저도 몇 년 전까지 탕자의 길을 걷다가 언니의 기도가 생각나서…… 지금 이렇게…… 더 이상……."

여자는 울먹거렸다. 그리고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에 대한 대비책은 구원의 확신이죠, 언니가 제게 가르쳐주고 떠났어요, 못난 여동생 하나 때문에 사창굴에서 전도하다 병에 찔리고…… 폭력배에게 쫒기다 그만 교통사고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시장 바닥을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바닥이 구정물로 흥건했다. 생선과 야채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역한 튀김 기름 냄새도 풍겨왔다. 언젠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 생각났다. 죽음이 어느날 당신을 찾아온다면 어떤 자세로 맞을 것인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데 부끄러움이…… 아픔과 함께 빠져나가면서 소망이 샘솟듯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이제부터 내 꿈을 찾자. 잃어버린 내 옛꿈을 찾아 살아가자. 해수야 니가 내 꿈을 찾아 주었어, 니가 그토록 원했던 그 꿈 내가 이루어 줄께.


그가 신학교로 복귀하는 날이었다. 그는 옛 동료로부터 핸드폰을 선물 받았다.

"네가 다시 돌아온 기념으로 주는 거야, 힘든 세월을 보낸 만큼 영성도 더 깊어져라."

그는 시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날 감격 속에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데 교문 쪽에서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남자가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여자 신학생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어이 시인, 오랜만이야."

그 순간 그의 뇌리에 강한 울림이 들렸다. 능내에서 본 주영식과 신해연의 모습
이 생각속에서 또다시 리바이벌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두 남녀는 바로?

의문점이 풀리면서 강한 회오리 바람이 주영식과 그의 사이에 일었다. 대지를 가르는 듯한 엄청난 바람이었다. 둘은 그 사이에 서서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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