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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우정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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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영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796회 작성일 2010-06-07 15:39

본문

거룩한 우정에 관한 고찰
                           
                          목    차            전민동 본당 샛별대학
                                                              김영우 (시몬)
1. 들어가는 말

2. 우정에 대한 의미

  가) 일반 세속에서 의 우정
  나)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우정
    1) 형제적 사랑
    2) 친구 관계에서의 사랑

3. 우정과의 관계에서의 거룩함
  가) 우정의 조건
  나) 우정의 관계

4. 신앙인의 거룩한 생활
  가)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
  나) 여생을 그리스도와 일치

5. 끝맺으면서





1. 들어가는 말

    벌써 2005학년도 2학기 샛별대학이 다음주(12월14일)에 방학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마지막 종강을 맞이하면서 저에게 주어진 <거룩한 우정>이란 주제 아래 함께 묵상하고 다같이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샛별대학 이치우(바오로) 학장님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먼저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학자 축일 기념일이며, 또한 계절로써는 대설이기도 합니다. 우리 샛별대학 학생들은 그동안 유능한 강사님들을 초빙하여 우리의 생활에 대한  뜻있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즉 품위 있는 노후생활, 일등국민, 매너, 한방 상식, 노년기를 즐겁게, 노년기의 건강관리 등 우리 실생활에 필요한 강의를 들었고, 또 실천하며 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강의하고자 하는 거룩한 우정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골로사이서 3장의 말씀인 거룩한 주님의 말씀 안에 그 뜻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을 추구 하십시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이 세상에서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샛별대학생들은 앞으로 많이 살아봐야 20년, 아니 50년 이상은 더 살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열심이 살아가면서 이제는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거룩한 우정을 통하여 거룩한 여생을 마치는 일만을 우리들의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강의를 개학날(9월7일)로부터 오늘까지 준비하면서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여러 책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연이 아닌 새로운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2005학년도 2학기 개학 첫날(9월7일수요일) 미사의 독서말씀을 보면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 십시요”(골로3.1-3)라고 말씀하셨고, 또 복음서에서는 산상설교(마태5.1-12)말씀으로 우리의 삶의 길을 가르쳤고, 오늘 종강미사 독서에서도 “야훼를 믿고 바라보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난다.”(이사.40.21-31)라고 하셨으며, 복음서에서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 샛별 대학생들에게 2학기 개학날로부터 오늘 종강까지 삶의 지표를 설정해주셨음을 인식하면서, 이번 저의 <거룩한 우정>이란 내용은 주님의 말씀 안에 모두 담겨 있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메세지를 저희에게 미리 던져 주셨던 것을 체험 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거룩한 우정이란 무엇이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연관이 되어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저와 함께 이 여정에 동반하시기 바랍니다.

2. 우정에 대한 의미

  가) 일반 세속에서의 우정

    우리는 흔히들 살아가면서 생전에 아주 친한 친구 셋만 사귀었다면 그 사람은 잘 살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주위에 내 마음과 같은 친구가 몇이나 있는가?  취미가 같고, 시간이 맞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생각이 나며, 건강이 따를 수 있으며, 종교가 같은 그러한 친구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내 마음을 전부 줄 수 있고, 매사에 관심을 아끼지 않으며, 항상 가까운 이웃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친구가 단 한명이라도 오늘 이 시간까지 함께 있는 그러한 사람이 우리 주위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술자리나 같이 하는 친구, 낚시나 등산이나 골프를 좋아해서 사귄 친구, 마음이 쓸쓸할 때 위로해주던 친구, 어려울 때 도움을 주던 친구, 한 동리 같은 이웃에서 사귄 친구, 각종 취미에 따라 모임에서 만난 친구, 학연이나 사회생활이나 봉사활동 계모임 등 여러 생활 속에서 만난 세속적인 친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벗으로 사귀어 왔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그러한 벗들이 지금 우리 주위에 몇 명이나 남아있습니까? 우리는 나의 생활 속에서 그러한 벗들과 정을 나누고 뜻을 맞추어가면서 살아왔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역사를 엮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한계를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가 않은가봅니다. 타인이 내 마음에 주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종말론적 연습을 생활속에서 살아갈 때 진실한 우정은 꽃피고 거룩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래오래 지속되리라 생각해봅니다.

    우정은 본질적으로 어떤 이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우리의 모든 감정과 존경심과 같은 마음과 찬미 또는 경이로움을 다 가진다 할지라도, 이것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정은 낳지는 못합니다. 우정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친구에 좋은가? 우정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어떤 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되찾는 것입니다. 친구를 가지기 전에는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다만 내가 해낸 역할 뿐입니다. 우정의 관계에서 쌍방은 그들이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까닭에, 그들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정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더불어 있고 싶어 하고, 다른 이 들에게 방해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우정

    우정이 있는 한 거기에는 절대자의 체험, 하느님의 체험이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길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고 바위 위에 떨어지기도 하며 가시덤불 위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과 즐거움에 억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집회서 6장 5절에서 1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은 친구를 많이 만들고 상냥한 말은 친구를 정답게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과 잘 사귀어라 그러나 네 마음을 털어 놓은 친구는 한사람만 택하여라. 어떤 친구는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에만 우정을 보이고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 어떤 친구는 원수로 변하여 너와 싸우며 너의 숨은 약점을 공개 한다. 또 어떤 친구는 너의 식탁에는 잘 와 앉으나 네가 불행 해지게 되면 너를 버린다. 네가 잘 살 때는 네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네 하인마저 마음대로 부리다가 네가 망하게 되면 등을 돌려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원수들을 멀리하고 친구들도 경계 하여라. 성실한 친구는 안전한 피난처요 그런 친구를 가진 것은 보화를 지닌 것과 같다. 성실한 친구는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으며 그 우정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의 신비한 약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런 친구를 얻을 수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참된 벗을 만든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도 그처럼 참되게 대하여준다.”  이렇게 성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형제적 사랑
   
  형제적 사랑이란 모든 인간 개개인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고 포용하며 관심을 기울이고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독점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진리에 근거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제각기 재능과 출생 등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으로 고백하신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종’이라 인식하면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앞에서 한 가족이며 형제/자매라고 받아드리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에 애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우정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돌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성에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보편적 형제애에 대하여 메리노는 말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낮은 자세로 하느님 앞에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 풍경들 모든 것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과 관계를 맺는다.”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익명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단순성과 겸손과 순수한 마음가짐으로써 타인과 대화의 일치를 이루는 크나큰 가치를 들어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800여 년 전에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을 오늘날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제 2의 그리스도로 추대하며 그 뒤를 따르고, 거룩한 우정의 표지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친우 관계의 사랑
   
    양자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던지 서로 마음이 통한다든지 성격이 상호 보완적이라든지 국적이 같다든지, 또는 종교적인 이상이 맞다는 조건 등을 근거로 한 선택의 결과에서 생기는 관계를 말합니다. 친구란 비록 비판을 당하거나 잘못을 지적받는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사랑스레 받아 드려짐을 느낄 수 있으며, 이해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이를 말 합니다. 친구란 특정한 일을 함께하지 않을 때에도 서로가 하나가 되어 사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육체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마음속으로는 서로 가깝게 있음을 느끼는 관계입니다. 친구란 상대방의 시간을 독점 하려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친구란 상대방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부추겨줍니다. 친구란 형제애로는 충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주의와 상호간의 무관심에 쉽사리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친구관계를 통해서 따뜻하게 데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3. 우정과의 관계에서의 거룩함

  가) 우정의 조건

    친구사이에 우정이 성립되기 위하여서는 표면적인 성격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공통점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또는 일상적 관심이 공동성만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우정을 설명하기에는 그리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형성되고 성장하려면 양 자가 다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기에 너무나 폐쇄적인 사람은 우정을 위해 시간이나 충분한 애정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에 우정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내적 풍요로움인 이 은총의 등불을 오늘에 사는 우리들의 삶인 등경 위에 올려놓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정의 필수적인 조건은 사랑받고 도움 받아야할 친구들에 대한 겸손한 존경심입니다. 친구간의 긴밀한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만남과 접촉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정에는 사랑의 본질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이리하여 우정 안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참된 우정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우정은 사랑함으로서, 사랑을 받고 줌으로서 다시 받는 완성된 모습의 사랑입니다.

나) 우정의 관계

    우정에는 서로의 ‘앎’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인식하고 의식하는 대상이 됩니다. 두 사람의 존재는 똑같은 ‘떨림’을 가지게 됩니다. 우정에 있어서 한쪽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똑같은 작용으로 우리의 삶이 절대자에 의해서 우정의 관계가 형성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에 대한 이 ‘앎’은 결코 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앎으로서 낮선 존재 안에서의 인간의 실존적인 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눈은 단순해야 하며 어린아이처럼 순진하여야 합니다. 두 사람이 우정 안에서 서로 함께 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현존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태리 움부리아 지방 작은 마을 아씨시에서 800여 년 전에 사셨던 프란치스코는 평소에 그렇게 싫어했던 나병환자를 만났을 때 그가 바로 하느님으로 느꼈고, 즉시 나의 벗으로 생각하고 우정의 입맞춤을 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나환자를 떠나올 때는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우정의 관계에서 회개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권능에 우리는 그저 감탄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를 뿐입니다. 우정은 단순이 더불어 존재함 그 이상의 것입니다. 친구는 내 존재의 일부입니다. 만약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어떤 모양이든지 그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을 우리 삶을 본질적 부분으로 만든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입니다.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가 가버린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우정은 이 내적 관계의 그 끝에서 한계에 접하게 됩니다. 즉 절대자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으로부터 상호간의 선사로서 자신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이제 더불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존재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의 온갖 혼란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그것이 상대를 물들게 하거나 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 자신의 존재를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욕구가 우리자신의 타락상 자기본위 권세욕 마음의 게으름 그리고 악을 피하려는 우정의 경탄할만한 요구가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정은 지속적인 정화가 있는 것입니다. 우정의 관계에 있어서 사리(私利), 위선, 마음의 굳음이 자연히 극복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조용함, 편안함, 그리고 잔잔한 태도를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친구와의의 관계가 시작될 때 우리의 삶은 초연해지며 우리는 사물에 대한 평정한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우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사물의 내적 아름다움을 참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4. 신앙인의 거룩한 생활

  가) 하느님의 뜻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빚 나시며...”하고 바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히’라는 말이 아주 중요 합니다. 이 거룩함이란 “하느님의 영광이 객관적으로 빚 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 모시게 해 주십시오”란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거룩해 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함이 우리 안에 남아있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성사로 거룩해짐으로서 죄를 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성서에서나 기도서에 나타나는 <거룩한>하느님의 말씀을 기술해봅시다.

첫째, 감미로우시고 아름다우신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시여 죽음에서 넘겨진 임금님 지극히 감미로우신 당신의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주님이 당신의 어지심과 지극히 거룩하신 육화와 지극히 가혹한 죽음의 힘으로 우리 죄를 용서 하소서.
둘째,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실행함이 나에게는 넘치는 위안이 되기에 나를 가차 없이 고통으로 괴롭히시는 것을 진정 기쁘게 받아 드리겠나이다.
셋째, 거룩하신 동정마리아여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 중에 당신 같은 이 없나이다. 비오니 성 미카엘 대천사와 하늘에 모든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우리의 주님 이시요 스승이시며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 앞에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해주소서.
넷째, 주여 당신의 거룩하시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다섯째,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 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양하나이다.
여섯째,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일곱째,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시며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덟째,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 이시로다.
아홉째, 예로부터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분입니다
열째, 거룩한 하느님 그리스도를 높이 찬양하며 우리자신도 일생을 통하여 거룩하고 의롭게 살도록 해주기를 기도합니다. <청원의 기도>

나) 여생을 그리스도와 일치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생로병사를 벗어나려고 무한이도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과학기술을 통하여 생명공학이며 인간복제이니 하는 생명에 관한 연구와 욕망이 끝임 없이 발달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좋은 세상 한없이 잘 먹고 잘 살기위하여 자기존재를 더욱 지속시키고자 건강만을 중시하고 자신의 욕구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서 너도나도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만을 Well-Being의 전부인양 모두가 우상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백여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의 삶속에 육체만의 편안함과 자기 자신만의 쾌락에 묶여서 이웃의 따뜻한 인정도 참다운 우정도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자기의 이기심과 세습에 젖어 미련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의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에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명공학이 발달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며 많은 이로운 점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나 우리에게 죽음이 없으면 생명도 없고 질병이 없으면 건강도 없습니다. 인간복제를 포함한 생명공학은 단지목숨부지나 건강유지를 뛰어넘어 생명의 존엄성과 창조주 하느님께 도전하는 악의 어두움으로 죄를 범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하루가 이렇게 아름답기도 하고 고통과 수고로움이 있는 것도 우리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거룩한 그분의 크신 영광을 찬미해야 할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서에도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순종할 의무와 대가를 보람 없이 봉사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므로 회개해야할 존재이며 하느님 앞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생활했던 옛 교부들이나 성인성녀 중에서도 가장 예수님 모습과 가까이 닮으시고 사셨던 제 2의 예수님으로 감히 말할 수 있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저자 토마스 첼라노는 말하기를 프란치스코는 세상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물질적 정신적 오해에서 벗어남으로서 영혼의 편안함과 자기 자신일 수 있는 능력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사랑과 우정으로 돌보았다고 하였으며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신학자 보나벤투라의 기록에도 그는 육체와 영혼 간에 갈등이 없었다하며 그분의 심적 자유에는 사회적 영적 자유가 뒤따르기 때문에 언제나 기도에 전염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환경론자 로서 그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했고 그는 태양의 노래를 부르시면서 피조물에 대한 형제애로서 새들에게도 설교했으며, 이 때 새들이 성인 손에 날아와 함께 노래했으며, 사나운 늑대가 그분 앞에서는 온순했다합니다. 이렇듯 성인께서는 자연을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여정의 동반자로 따뜻한 우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갖 숲과 바람과 별들과 모든 초목들이 베들레헴 마리아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성인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육화된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달을 보고 누나라고하고 해를 보고 형님이라고 불렀으며, 우리의 죽음까지도 자매라고 부르는 프란치스코의 순수한 영성은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였으며 그러기에 가장 인간다운 인성으로 오늘의 우리들 심장에 생명의 피를 주입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생명은 발명품도 아니며,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과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의 모상으로서 오늘도 이 자리에서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원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우리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고, 내 육신마저도 훌훌 떠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칠 줄 모르고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의 규모도 커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기주의(욕심)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더 많은 재화와 권력과 명예를 확보하며 상대적 우월성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심이라는 이름아래 우리 인류는 세습적 관습으로 이미 종속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인류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축에 의하여 인류 스스로가 휘말려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이 세속적인 생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의 유언에서 세속을 떠났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화개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속을 떠난 것은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세속 즉,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으로 얼굴을 돌린다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지난날에 이 모든 과정들을 다 겪었습니다. 이제 남은 생활은 진정한 회개의 복음적 생활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10년, 20년, 아니 50년 이상은 더 살지 못할 값진 나의 삶의 여정을 아직도 세속을 버리지 못하고 뒤만 쳐다보는 어리석은 생활로 인생을 끝마쳐야 되겠습니까? 한 마디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아서 하늘나라의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배우고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늙었다고, 힘이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좌절하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볼 수만 있어도, 감각 기능이 느낄 수만 있어도 그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육신을 위해서는 여러 좋은 것을 다하려하지만 영육을 위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생각을 합니다. 절대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버리거나 소홀히 듣지 마시고, 거룩한 우정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과 친교를 이루어 기도를 개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매일 미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실 것을 거룩한 우정을 통하여 권고하는 바입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매일매일 숨쉬며 살아가는 것도 하느님의 은혜요,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는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임을 자각하고, 항상 감사와 찬미를 기도로써, 생활로써 삶을 살아갈 때 과연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들은 거룩한 당신의 아들, 딸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에 입학할 수 있는 특은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로인하여 주님과 일치하고 영원히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5. 끝맺으면서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기적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로 이루어진 탄탄한 일상과 그로 인해 쌓여진 하느님과의 독특한 우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강한 내면적 힘으로 자신을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세속의 잡다한 생각들을 다 정리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참다운 우정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살아갈 때, 요한바오로 교황께서 “나는 참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 하시오.”라고 유언을 남기었듯이 우리도 마지막 죽음을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평화가 항상 형제님 자매님들과 함께 하시길 충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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