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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嗣永 帛書에 관한 시대적 배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 김영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654회 작성일 2010-12-06 13:05

본문

黃嗣永 帛書에 관한 시대적 배경


목 차

1) 머리말
2) 황사영의 세보
3) <帛書>의 작성 과정과 발견
4) <帛書>의 구성
5) <帛書>에 대한 평가
6) <帛書>에 관한 시대적 배경 이해
6.1) 황사영백서에 나타난 신 자유획득 방향
6.2) 서양 국가들의 재정 원조
6.3) 북경교회 와 연락
6.4) 교황과 청 황제를 이용한 방법
6.5) 서양 선박의 요청
6.6) 서양 선박에 대한 인식
7) 서양선박의 요청 사건의 결과
8) 정부측과 교회측에 나타난 백서의 인식
9) 맺음말





학 교 : 대전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교리신학원)
제 목 : 한국교회사
담 당 : 김기만(교수)
제출자 : 0602 김영우(시몬)
날 자 : 2006년 11월 일


1) 머리말

1784년 한국천주교가 창설된 후 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정착과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자체적으로 성직자를 만들어 교회 운영을 하다가 여러 가지 모순된 상황에 이르자 북경교회를 통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전개에서 진산사건이 발생 되었고, 그로인한 박해로 신유박해(1801년)로 이어졌으며, 1794년 말에 주문모(야고버) 신부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6년 후인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고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노론 벽파가 집권하면서 신유박해가 1801년에 일어나게 되어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황사영 백서에 관하여 그 시대적 성격을 먼저 분석하면서 이에 대한 정치적 배경과 신유박해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응을 살펴보며 황사영의 세보와 연관을 보고 그 당시의 사회사상과 배경을 이해하는데 그 역점을 두었다.

2) 黃嗣永의 계보

黃嗣永의 祖父재정(在正)(1717-1740년)은 진주 강 씨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사촌 재중(在中)의 큰아들 석범(錫範)(1747-1775년3월18일)을 양자로 들었는데 그가 곧 황사영의 아버지이다.
석범은 25세인 1771년(영조47년 辛酉) 2월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문과(文科) 병과(丙科) 11인중 하나로 급제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무년시(武年試)에 증조부 준(晙, 1694-1782년)이 현직 감역(監役)으로 응시하여 을과(乙科) 7인중 한사람으로 급제하였다. 증조부는 그 후 호조판서 공조판서 지중구부사(知中摳府事)를 거쳐 88세에 들었고 석범은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子)와 한림(翰林)을 역임하였고 29세 로 요절하여 훗날 종4품(朝奉大夫)에 봉(封)하였다. 황사영의 아버지석범은 진사(進士) 이동운(李東運)의 딸 이윤혜(李允惠)와 결혼했으나 젊은 나이로 요절함으로서 황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되었다. 황사영의 외조 이동운은 평창이씨 로서 이승훈(李承薰)과 일가이며 이학준의 조부이다. 따라서 석범은 이학규의 고모부이며 황사영과 이학규는 내외종 사촌간이다. 다산(茶山)이 추안에서 황사영을 5촌 고모(五寸姑母)의 외손(外孫)이라고 한 것도 이 족보에서 밝혀진 셈이다.
황사영의 관향은 창원인데 창원황씨는 고려 시중(侍中) 황충준(黃忠俊)을 시조(始祖)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波)와 진산부원군 황석기(黃石寄)를 시조로 하는 진산 공파가 있다 황사영의 시조 황석기는 본디 원나라 사람이었는데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로 와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진산부원군에 봉하여 후손이 진산(會原)곧 창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황사영은 시조 황석기로부터 17대손이다. 그의 집안이 조선조에 들어와서 현달하게된 것은 세조때 장무공위(蔣武公衛)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면서 부터였다. 그 후 황사영의 증조 준(晙)이 공조판서 중구부사(中摳府事)를 지내기까지 대대로 조선의 높은 벼슬을 한 명실공이 그야말로 명문 대가었다. 그의 집안이 강화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장무공위의 아버지 조헌(糟軒)의 묘가 강화도 장령면(長嶺面)대조동(大조洞)에 있다고 한다. 황사영은 창원황씨 진산공파 양반가문에 태어나 16세의 어린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장래가 촉망한 수재였다. 황사영은 (1775년-1801년)초기 한국천주교회사상 가장 문제적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서울 서부(西部) 아현(阿현)에서 태어나 정약현(丁若鉉)의 딸 정난주(丁命蓮)과 결혼하면서 1791년 이승훈에게서 교리서를 얻어 보고 천주교를 믿기 시작 한 이래 1801년 11월5일 서소문밖에서 치명하기까지 그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독실이 하였다

3) 황사연백서<帛書>의 작성과정과 발견

1801년 2월10일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김연이의 집으로 피신하여 강완숙과 만나고 강완숙은 신자들의 피신을 도왔다. 그때 김의효를 만난 황사영은 그의 제안대로 상복을 입고 변장하여 김환빈과 함께 제천 김기동의 집으로 피신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제천에 도착한 황사영은 백서를 작성한다. (1801년 3월 말경) 김한빈이 상경하여 박해상황을 탑문하고 황사영에게 알려줌으로서 시작된다. 이때 이미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등 6명이 참수되었을 때였다. 아울러 3월12일 자수한 주문모 신부의 소식도 전해 들었다.
황사영은 1791년 신해박해 때도 천주교를 求世의 良藥이라고 여겼고 1795년 최인길 집에서도 주문모신부를 만난이후에는 신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안았다. 황사영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사형되고 신부마저 자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살아갈 힘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황사영은 이제 자신만이 남았다는 생각에 자신이 교회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밤낮으로 천주교를 널리 펼 계칙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사영은 김한빈이 소식을 전한 4월7일 이후에 백서의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하며 8월26일 황심이 방문했을 때 원고를 보여 줄 수 있었고 황심의 방문으로 새로운 내용을 보충하여 9월25일백서<帛書>를 완성 하였다.
이때 황사영은 황심과 의논하여 북경을 왕래하며 서양인과 안면 있는 그의 이름으로 백서를 보내기로 하고 9월말 전에 황심이 다시 와서 백서를 가져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 백서는 옥천희(玉千禧)에게 돈40량을 주며 전해져 10월에 있을(1800년) 동지사(冬至使)편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할 예정 이였으나 옥천희는 1801년 6월 북경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9월15일에는 그를 기다리던 황심도 체포 되었다. 황심은 황사영으로 인해 옥사가 커진다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하여 황사영의 은거지를 자백하였는데 그 결과 황사영은 9월29일에 김한빈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었는데 황사영의 몸에 감추어져있던 백서도 발각되고 말았다.

4) 백서(帛書) 의 구성

황사영은 제천배론토굴에서 신유박해의 진행상황이 시파와 벽파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상황 치명자들의 순교 사실 및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구상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문장의 편지를 명주 비단에 썼다. 이 편지를 명주 비단에 썼다 하여 백서(帛書>라 부른다. 백서는 가로가 60 센치 세로가 39 쎈치 크기의 명주 베에 13,311 자를 작은 붓글씨 정자로 쓴 편지이다.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원본이 보관되어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1) 서두 향후(向候): 제원(諸願):복망(伏望)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聖敎)를 증명 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서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2) 신유박해의 발단과 그 진행
3) 순교자의 활동과 그 순교 사적(순교자전기)
4) 신부영입과 신앙의 자유 획득 책
5) 대박청구

5) 백서(帛書)의 영향과 평가(評價)

1801년9월29일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발각된 백서에 대한 당국자들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흉서로 규정하고 특히 청구의 종주국발동 조선감호 책 대박청원을 3흉조라고 규정했다. 1801년 10월 동지겸진사 편에 본래의 백서를 15분의 1로 줄인 가 백서를 청나라로 보냈으나 별 문제 삼지 아니했고 청나라의 외교문제도 해결되었으며, 12월에는 토사반교문(討邪頒敎文)을 반포함으로서 국내의 박해도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서의 가장 큰 영향은 이것이 당시 인들의 천주관을 왜곡시켰다는 사실이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부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증폭되었고, 이에 조선정부는 백서를 역모에 대한 물질증거로 제시되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정하상 유진길이 선교사를 맞이한 것과 3명의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낸 것을 백서의 내용을 실행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결국 백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이후 천주교인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확산되었고 서양세력을 통해 국가를 정복하려는 반민족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유인길은 백서의 내용을 역적이라고 평가했고 교법과도 같지 않다고 했다. 정하상도 황사영을 역적으로 평가하고 교법에 어긋난다고 답했다. 한국교리사의 저자인 달래는 백서의 내용이 황사영이 흥분한 상황에서 나온 비현실적인 무모한계획이라고 인정했다. 정약용이 아무리 당시의 사회변화를 추구하였다 하더라도 정약종처럼 유교적 세계를 떠날 수 없던 것과 조선후기에 실학자 안정복(安定福)은 그의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천주교의 천지창조설을 언급하면서도 천주교를 믿기 어려웠는데 이러한 시기에 황사영은 백서의 내용과 같은 굳은 신앙을 간직했다는 것은 오늘날 천주교 역사 안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다.

6) 백서(帛書)에 대한 시대적 배경

1784년 교회가 창립되고 그 이듬해인 1785년에 일어난 을미추조적발사건(乙己秋曹摘發事件)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집 주인이었던 중인계급의 김범우(金範禹)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고 1년 후에 죽었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순교하였고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모셔온 윤유일 최인길 등이 순교하였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주문모신부는 다행이 몸을 피하여 성사를 집행하고 전교에 열중하며 북경교회에 연락을 하고 안으로는 명도회의 육회와 같은 신심단체를 만들어 신자들을 구령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1999년 1월에 천주교를 옹호해주던 정승이 죽고 뒤이어 1800년 6월28일 정조가 승하함으로 순조가 11세의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 김정순 왕후(金貞純王后)가 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정순왕후는 은 세자(恩 世子)가 죽어야한다고 주장한 노론계의 거두 참판김귀주(金龜柱)의 누님이었던 그녀는 김귀주가 정조 때 유배되어 죽자 그를 죽여야한다고 주장한 남인과 정조에 대해 가슴속깊이 한을 품고 있던 사람 이였다.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는 1800년 11월 정조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부터는 사회가 비록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벽파가 수가 많아 정조도 그들을 두려워했다. 이런 형편에 정조가 죽자 천주교를 박해하던 공서파까지 벽파에 합세하여 큰 박해를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이틈을 타서 주문모신부와 활발한 전교활동을 했던 것이다. 1801년 1월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인을 색출하기위하여 오가작통법의 시행을 전국에 선포하고 우승지(右承旨) 최헌중(崔獻重)이 상소로 이승훈 정약용 등을 사학죄인으로 지목하고 잡아들여 국문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상소하였다. 이것은 남인시파를 제거하기위한 각본이었고 2월10일에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등 3명을 잡아다가 의건부에서 추국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신유박해 시작 이였다. 당시 박해자들은 봄에 일어난 춘옥(春 獄)이고 다른 하나는 겨울에 일어난 동옥(冬獄)이다. 전자는 오가작통법의 선포와 함께 봄 2월에 일어난 박해이고 후자는 황사영이 9월 27일에 체포됨으로 말미암아 겨울 10월에 다시 일어난 박해를 말한다.
황사영이란 이름은 2월10일 정약용의 고문공조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정약용집에서 압수한 서찰 중에서 황사영 편지가 발견되고 정약용이 그가 사학을 한다고 진술함으로서 의금부에서는 2월10일 권철신 조동섬과 함께 그를 잡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황사영은 도피하여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집으로 도피를 하면서 김의호 에게 도피 할 방도를 물으니 머리를 깎고 중이 되면 좋겠다고 하나 황사영은 중으로 변장을 하는 것은 우리 종교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시점에서도 불교의 변장을 싫다고 거절 하였다는 것은 그의 열심 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김의호가 황사영을 상주로 가장시켜 도피를 주선한다. 그때 김한빈과 송재기 집에 머물면서 함께 도망갈 곳을 의논했다. 다음날 황사영은 수염을 깍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성묘 가는 사람처럼 꾸몄다. 상복을 입고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온 황사영은 여주완주를 거쳐 2월 그믐에 팔송정 점촌 김기동의 집에 도착 한다. 거기서 김한빈은 김기동에게 황사영을 소개 한다 그리하여 김한빈과 김기동 두 사람이 황사영이 숨어살도록 토굴을 팠다. 이 토굴은 봉양면 구락리 646번지 최재현씨의 집 북쪽남향을 하고 있다. 황사영은 이 토굴에서 숨어 백서를 썼던 것이다. 김기동이 토굴을 파준 것도 교회재건을 갈망하는 표현 이였고 김기동은 황사영보다 조금 앞서 2월 초승에 배론 으로 숨어들어온 사람으로 옹기를 꾸어 겨우 연명을 하는 처지였다.

6.1) 황사영 백서에 나타난 신앙자유 획득방향

황사영은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1801년 9월 신유박해로 죽어간 많은 신자들과 주문모신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신유박해의 진행과정과 순교자들의 열전 그리고 박해로 어려워진 교회의 상황과 박해의 종식에 대한 강한열망을 표현하면서 조선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다섯 가지 방향을 담은 백서를 썼다.
첫 째 : 서양 국가들의 재정원조
둘 째 : 북경교회와 연락할 방향
셋 째 : 교황과 청 황제가 조선에 압력을 가해 천주교를 받아드리도록 하자는 방법.
넷 째 : 내복 감호책(內服 監護策)
다섯째: 서양선박 영입방안
이중에서 가장 요긴하고 시급한일은 북경교회와 연락방안중의 하나인 책문(柵問)안에 가계를 차리는 일이라고 하면서 빨리 이루어지길 희망 하였다.

6.1.1) 서양 국가들의 재정원조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을 잘 협조 할 수 없는 조건은 재정이 부족한데서 받아야할 시련이었다. 재정만 있으면 교회재건을 할 수 있음을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한다.
첫째: 인재를 모울 수 있다.
둘째: 을묘년(1795년)이후 교회에 닥친 어려움을 정조가 주문모신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노론의 남인에 대한 미움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주문모신부가 죽고 남인이 몰락하였으며 저명한 신자들이 죽었다.
셋째: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서울에 비해 허술한 지방에 교회를 재건할 수 있다.
넷째: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는 신자색출이 심하지만 황해도와 평안도는 신자가없어 일반인들의 의심이 없고 변문에서 감시와 조사가 허술하다.
다섯째: 갑인년(1794년)에 주문모신부가 왔는데 신부들이 삼가는 것이 부족하여 신분이 노출되었는데 지금은 내적신앙생활에 정진할 때이라 곧 국가행정력의 영향력영향 정치적사회적 교회적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재정의 도움만 받는다면 교회의 재건이 될 수 있고 이를 위해 서양 여러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6.1.2) 북경과의 연락

황사영은 조선교회를 재건하려면 중국의 북경교회와 접촉해야 함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첫째: 북경을 통과하는데 두 가지 어려움은 중국인과 다른 머리모양과 언어이다. 조선인이 북경에 가서 젊은 교인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동문 춘문(冬門春門)에서 암호를 정하여 만나자고 하였다.
둘째: 열심하고 신중한 중국신자를 책문(柵門)안에 이주시켜 가계를 운영하면서 서신 왕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6.1.3) 교황과 청 황제를 이용한 방법

교황이 청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부탁하여 청 황제가 조선에 압력을 가해 천주교를 받아드리도록 하자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17세기 중엽 이래 점차 서양 모든 민족의 생활에서 교황직의 신망이 떨어지고 절대주의적인 국가 권에서는 이미 교황이 보편교회적인 자치권을 요구할 공간이 많지 않았다. 이때 계몽사상과 혁명이 유럽전역을 휩쓸었는데 특히 프랑스혁명(1789-1799년)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프랑스 대혁명의 표어는 평등 공평한 의무를 지도록 했으며 천주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황 비오6세(재위1775-1799년)는 성직자 공민헌법에서 대해 비난하고 여기서 협조한 성직자들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교황교서를 발표하자 제헌의회는 당시 교황령이었던 아비농과 베네송을 빼앗고 수많은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유형을 보냈다. 교황은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한 나폴레옹1세에게 저항했다가 교황령을 많이 양도당한 후 1799년 발랑스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교황 비오7세(재위1800-1823년)는 프랑스와 절충하는 것이 생애에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1801년7월 나폴레옹과 정교조약을 맺었는데 나폴레옹이 1802년 이 정교조약에 77개의 기초 장을 더해 이 조약일부를 다시 취소하는 태도를 보이자 이에 항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교황은 1804년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을 주도했으나 더 이상 나폴레옹에 대해 협조를 거부함으로서 프랑스와의 관계를 호전 되지 않고 교황령을 점령당했다. 이때 교황은 나폴레옹을 파문하자 나폴레옹은 교황을 1812년에 파리근교에 억류하였다.

6.1.4) 서양 선박의 요청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서양선박 수백 척과 5만 여명의 병력과 대포 등 무기를 가지고 해변에 접근해서 서양의 전교 선이라고 칭하고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포교를 공인하도록 방안을 제시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실고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선비 3.4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입니다. 만약 사신을 받아 드리지 않으면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양선박요청의 배경에 대해 유항검사건에 연좌되었던 이우집의 공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가 호서지방에 넓이 퍼졌던 “정감록”의 영향과 김건순에게서 드러나는 당시사회에 유포된 이상향에 대한 동경 해도론(海島論)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었다. 황사영이 말한 수 백 척의 배와 5.6만 명의 군대와 대포는 침략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상징성이 강하였으며 이 방안은 교회의 재건을 넘어서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으로서 정치적인 목적을 부정하였지만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중대한 협박이었다. 그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민족적인 행동이아니라 천주교 수용을 거부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부에 대한 위협임을 강조하였다.

6.1.5) 서양 선박에 대한 인식

1796년 말 선교사영입의 경험이 있었던 교회의 지도자들과 주문모신부는 서양선박을 요청하는 서한을 북경주교에게 보낸다. 북경 구베아 주교의 인식과 같이 서양선박은 선교사가 서양임금의 편지와 선물을 갖고 다니면서 우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선박을 타고 입국하게 되면 천주교금령이 풀려 천주교를 널이 펼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신유박해 이후 1811년과 1826년에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선박으로 선교사 영입하려는 열정을 토대로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또한 1839년에 순교한 선교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선교사들은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하였다. 대부분 신자들은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했던 정감록 영향을 받는 유항검이 이우집에게 “한바탕 결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국가와 교회에서 금하는 참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곧 신자들이 요청한 서양선박을 정감록이 풀고 있는 일장판결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과 동일시 한 것이란 인식이다.
황사영의 백서에서 선교사영입문제가 천주교가 국가에는 유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국가 입장에서 보면 반민족적 인 것이고 중대한 협박으로 생각한 인식 이였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신유박해는 정치적으로 남인이 거의 몰락하게 되었고 교회적으로는 휴황검 황사영등이 서양 선박 영입을 시도 한 것 때문에 대역부도의 대죄로 사형을 당하였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거나 유배를 감으로서 조선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제시한 방안 중에 큰문제로는 내복감호 책이다. 조선을 청나라에 내복 시키는 것, 영고탑 희귀설을 이용하여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키는 것 조선을 청의 부마국으로 만듦으로써 청나라에서 행하는 것처럼 신앙의 자유를 이루도록 하는 방안은 황사영이 청나라 정세에 대하여 어두웠을 뿐 아니라 당시조선 중화주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이적화의 음모였고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반민족의 방안 이었다

7) 백서(帛書) 서양선박 요청사건 결과

조선정부와 지식인들이 서학을 사학(邪學)이라고 한 것은
첫째: 양묵자(楊墨子) 도불교(道佛敎)와 같은 이단사설이고,
둘째: 명말 청초시기의 패관소품(稗官小品)같은 경조부박(輕佻浮薄)한 한문에 경박한 무리들이 물들었기 때문이며,
셋째: 황건적이나 백련 교도와 같은 반역을 준비하는 사교집단 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36년부터 파리외방선교사들에게 신학교육을 받은 김대건신부는 1845년“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의 보고서”에서 황사영이 이 땅의 천주교가 너무나도 억압당하고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보다 못해 교황청에 교모하게 편지를 써서 종교의 자유를 폭력으로 얻기 위해 군함을 보내주도록 청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후대에 백서를 이해하는 기준은 백서의 원본이아니라 정부 측 남인 측 노론 측 교회 측에서 작성된 이본들이였다는 점을 생각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은 오늘까지도 이어져 황사영의 백서라고 하면 결국 서양선박을 불러 드리려한 문서로 인식 되고 있다.

8) 정부나 교회 기록에 나타난 백서의 인식

“순조실록“에는 백서가 교황을 통해 중국황제에게 압력을 청원하는 방향 감호책(監護策) 서양선박영입책등 3조 흉언이 있다고 하였다. 신유박해를 마무리하고 반포한 ”반교문”에서는 흉모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없이 다만 3조 흉모가 있다고 하였다.
1862년 다블뤼는 ‘Mgr.Daveluynotices. Vol.5’의 황사영에 대한 순교사기에서 백서에는 황사영이 유럽인에게 병사들을 요구한 것과 외국인들을 이끌기 위하여 돈을 모우고 비밀로 군대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835년 파리외방선교회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는 백서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만 인식 하였는데 그들이 입국한 이후에는 국가와 교회의 입장에서 백서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된 교회 지도자 유진길(劉進吉)은 백서의 내용이 만고에 없는 역절이라고 흑 평했다. 정하상(丁夏祥)도 황사영을 역적으로 평가하였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교회법에 어긋난다고 했다.

9) 끝맺음
황사영의 백서에 관하여 반국가적인 내용과 반민족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또한 반대로 황사영의 행위가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신앙적으로 바라보았던 현실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호교론 적 입장으로 적극 옹호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말까지 거의 100여 년 동안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이처럼 작성자가 쓴 원본이 현재까지 남아보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사영의 백서의 사료적 가치는 새로운 안목으로 재검토 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신유박해(1801년)는 단순히 천주교의 탄압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집단세력이 정치적과 대립정파를 서학의 배우로 몰아 제거하기위하여 서학도(西學徒)를 패륜의 극악무도한 흉적으로 몰아 탄압 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황사영을 서학이 수용되고 이양선이 접근해오는 시대적 조건을 나름대로 활용하여 사회변역 사상변역을 시도한 개혁운동가라고 보고자한다 황사영의 백서는 당시매우 불안했던 조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밝힌 고발장으로 뿐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자유가 우선임을 일깨워준 인권선언서로서 높이 평가되어야한다. 백서가 갖는 의미는 백서자체의 사료적 가치나 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의 중대성을 별도로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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