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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외나들이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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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완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2건 조회 998회 작성일 2008-01-10 22:40

본문

첫 해외 나들이를 회상하며

  이달중순에 아내와 중학생 막내아이가 중국으로 겨울여행을 간다.
해외 여행할 때는 항상 내가 같이 갔었는데, 이번에는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중인 둘째아이와 대련에서 만나 여행을 하기로 되어 있다.
내가 같이 가지 않아도 별 걱정이 되지 않을 일인데, 괜스레 잠깐 동안 걱정 아닌 걱정이 스쳐갔다.

 1974년초의 일이니 오래전 일이다.
부산항에서 눈물 어린 아버지의 모습을 뒤로하고 팔백산호(가명)에 올랐다.
눈물을 훔치시는 아버지께서 더 슬퍼하실 것 같아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배에 올랐다.
그때 나이가 19살이었으니 미성년자 때였다.
이역만리로 그것도 망망대해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사실 나도 이를 악물고는 있었으나 속에서는 이별의 슬픔이 복받쳐 오르고 있었다.
배에 오르는 사다리를 다 올라가 갑판에 서서 멀리 계신 아버지께 빨리 가시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배 안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숨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렸다.
나의 목적지는 아프리카 북서쪽에 있는 스페인령의 작은 섬 테네리페이었다.
그곳에 내가 승선할 원양어선의 기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대양호(가명)의 통신장으로 승선하여 근무할 예정이었다.
부산에서 그곳까지 약 2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였다.
태평양을 횡단하여 파나마운하를 통과하여 대서양을 횡단할 예정이었다.
그곳에 가는 동안 팔백산호에서 실습통신사로 통신장 수습을 하게 되어 있었다.

  부산항을 출항하여 8시간 정도지나자 뱃멀미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뱃멀미가 점점 심해졌다.
뱃멀미는 중간 기착지인 하와이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를 않았다.
부산 출항 후 처음 며칠은 바다가 잔잔하여지면 멀미가 다소 줄어드는 듯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에 들어서 항해를 하면서부터는 날씨에 관계없이 머리가 매우 아프고 편도선이 쑤셨다.
쓸개의 쓴 물이 나올 정도로 진절머리 나는 구토가 계속되었다.

  복도의 정수기를 붙들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본 나이 많은 갑판장이 안쓰러운 듯 말했다.
이십일 정도 지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증상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래가도 한 달이면 적응이 된다는 것이었다.
부산항을 출항한 지 근 이십여 일이 지나도 전혀 좋아지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갑판장이 화와이 입항을 앞두고 조언하였다.
하와이에서 귀국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선박생활 수십 년이 되었지만, 나같이 멀미에 적응 못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승선생활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였다.
사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잠시나마 그럴까도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어렵게, 어렵게 취업한 것이었다. 중간에 돌아가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어 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을 보고 진퇴양난이라고 할 것이다.
체질이 맞지 않아 승선생활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지금에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러한 고통스런 뱃멀미는 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좋아지기는 하였으나 승선 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타 본 배라야 친구들과 장난삼아 잠깐 타 본 한강의 나룻배가 고작이었다.
바다구경도 중학교때 부산으로 수학여행갔을때와 고등학교때 인천 월미도에 친구들과 놀러간 것이 다였다.
 
  이렇게 심한 멀미를 겪으면서 하와이에 입항하였다.
당초 항해계획에는 하와이에 입항할 계획이 없었다. 하와이를 지나 파나마까지 직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쿠시로항에 정박중에 수리했던, 기관의 크랭크 핀이 계속 마모되어 항해를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관 수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와이에 입항하게 된 것이었다.
크랭크핀 부품이 하와이에 없어, 일본에서 공수하여 와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간 하와이에 정박예정이었다.
하와이에 입항하여 사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통신장이 나를 찾았다. 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하였다.
나를 하와이에서 항공편으로 테네리페로 바로 보내라는 지시라는 것이었다.
하와이에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여 테네리페까지 항해하는 데는 한 달 이상 소요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승선할 선박이 통신장이 없어 출항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인가? 이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이었다. 
지금에 생각하여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음이 틀림없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10장13절)

  생전 처음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 서북단에 있는 작은 섬, 테네리페까지 가게 되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걱정을 하였더니 통신장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공항마다 에이전트에서 보낸 사람이 나와서 안내를 하여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 수중에는 한 푼의 돈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그것조차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1974년 3월경이었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행의 비행기에 탔다.
안내방송이 영어와 일어로 나오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기내식을 먹는데 음식이 어떤 종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음식 중에 익히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전혀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맛이 없었다.
후에 외국생활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그 익지않은 생선은 연어회였다.
그 맛없는 연어를 먹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랬는지 배탈까지 생겨 설사를 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공항 밖으로 나가니 정말 에이전트에서 나와서 안내를 하여 주었다. 
에이전트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에 옮겨 탔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공항 내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곧바로 옮겨 탔다.
뉴욕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이 두꺼운 옷을 꺼내 입는 것이었다.
밖을 내다보니 눈이 와 있었다.
나는 뉴욕의 기상상황은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하와이에서 출발하였었다.
때문에 내 복장은 하와이에서의 복장 그대로, 달랑 반소매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뉴욕공항에 도착하여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에이전트가 나왔겠지하고 공항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 탑승수속을 직접해야 만 했다.

  탑승수속을 어디서 하며, 어느 곳에서 탑승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내데스크에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다.
궁금한 것은 머릿속에서 영작을 하여 물어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상대방이 하는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격증 시험 보느라고 그래도 나름대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었다.
시험에 합격했으니 해석과 영작을 제법 하는 줄 알았었다. 착각이었다.
막상 대화를 하려니 이건 상황이 영 딴판이었다.
결국, 눈치까지 동원하여 대강 간신히 알아챘다.
마드리드 행 비행기를 타려면 버스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스 타는 곳이라고 알려준 곳에 가보니 그곳으로 이동할 만한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시내버스뿐으로 공항버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몇 분을 헤매다가 결국 공항 경비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버스에 탔다.
드디어 버스를 찾았다는 기쁨도 컸고, 이것을 알려준 공항경비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너무 고마워서 우리나라 식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땡큐를 연발하였다.
공항경비원은 빨리 가라는 몸짓으로 정류장에 들어오고 있는 버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안도하면서 버스에 타자 버스운전사가 표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 순간 정신이 아찔하였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이용하는 버스는 모두 무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요금을 받는 시내버스였다.
그 순간 당황한 것은 다름 아니라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할 줄 모르지, 어떻게 하여야 할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등에서 식은 땀이 솟고 얼굴에 열이 올라 콧등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운전사에게 이렇게밖에 말하는 것 뿐이었다.
“ I am sorry. I am Korean. I have no money. I am sorry"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 등에 꼿혀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자 운전사가 내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어져 있는 비행기 표를 가리키면서 달라고 하였다.
그 순간, 이제 꼼짝없이 파출소로 끌려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찌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닥친 것을 알게 되자, 되레 침착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애라, 모르겠다. 파출소에 가서 말이 안 통하면 뉴욕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한국 사람을 불러 통역을 하겠지. 죄진 것도 아니고 한국대사관에서 와서 해결해 주겠지.”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니 버스에는 나 혼자만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운전사 옆에 약 이십 분 정도 줄곧 서 있었던 것이다.
운전수가 앉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버스가 나 혼자만 태우고 5분정도 왔을 때였다.
불빛도 밝지 않은 어두침침한 곳에 버스가 섰다.
“이제는 파출소에 가는구나” 하고 운전수를 쳐다보았다.
운전수가 출입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면서 비행기 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비행기 표를 받아 든 나는 운전수가 나보고 먼저 내리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출입문을 내려서서 운전수가 내리는 것을 보려고 돌아보니 운전수가 자리에 그대로 앉자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바라보니 마드리드 행 비행기회사, 리베리아의 간판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운전사가 이곳까지 태워다 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저 운전사를 바라보며 "Thank you very much"만을 연발하였다. 그
러는 나를 보면서 운전수는 가라고 손짓을 하여 주었다.
어렵게 스페인 마드리드 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었다.
미성년자가 혼자, 첫 비행기여행을 하면서 말도 잘 안 통하는 세계적인 국제공항에서
이 정도 경험만 한 것은 행운이 아닐까?

  그렇게 하여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넘어 마드리드를 거쳐 무사히 아프리카 서북단 아름다운 작은 휴양지 섬,
테네리페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도착하자, 기지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지장을 보자마자 반가운 인사보다는 불평을 털어놓았다.
“외국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 돈 한 푼주지 않고,
태평양의 하와이섬에서 대서양의 테네리페 섬까지 가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도대체 회사에는 외국여행을 해 본 사람도 없습니까?
3달러가 없어서 뉴욕에서 대한민국 사람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켰습니다.
이런 일이 있게 하여도 괜찮은겁니까?”
 쉬지 않고 쏟아내는 내 불평을 듣고 난 기지장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고생은 하였지만, 좋은 경험을 하였군요”
  젊을 때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생각하여 보면,
그때의 경험이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외국여행과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아빠와 함께 하지 않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아내와 아이들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2008 정초

                                牧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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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혜님의 댓글

한미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처음이라는 것은
왜 그리 가슴 짠해지고
의미를 두고 싶은지요 ㅎㅎ
좋은 경험! 정말 좋은 친구처럼
두고두고 생각해주는 보석창고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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