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운명이라는 길
김혜련
운명을 믿는가? 나는 물론 골수 분자적 운명론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인간을 포함한 이 모든 우주를 지배하는 그 어떤 절대적이고 초인적인 힘인 운명을 부정할 자신은 없다. 나도 모르게 운명에 집착하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나는 또래 아이들이 갖는 값비싼 장난감, 예쁜 옷, 맛있는 음식 등을 추구하는 욕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님 덕에 어쩔 수 없이 부모 곁을 떠나 엄한 할머니 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란 나는 또래 아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어두운 아이였다.
술고래 할아버지와 무서운 할머니가 아침 일찍 농사일을 나가시고, 여호와증인인 삼촌이 농사일을 하러 가거나 종교 활동을 하러 나가고,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해박하고 얼굴이 예쁜 고모지만 평생 꼽추라는 운명의 틀에 묶여 슬퍼보였던 고모가 외출하고 나면 할머니집에 올곧이 어린 계집애인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곤 했다. 텃밭에 피어 있는 노란 상추꽃, 하얀 들깨꽃, 보랏빛 가지꽃, 풋고추, 붉은 고추, 단감나무, 떫은 감나무, 석류나무, 돌배나무, 흑돼지, 수탉, 암탉, 병아리, 강아지 어미개, 제비 가족, 하물며 쇠스랑, 호미, 괭이, 삽, 고무래, 손수레, 절구통까지 내게는 친구가 아닌 게 없었다. 하루 종일 동무삼아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었다. 하긴 동네 조무래기들을 불러 그 나이 애들처럼 신나게 놀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일터에서 돌아오신 할머니께 어김없이 매를 맞아야 했다. 재양을 떨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예닐곱 살 철부지애들이 놀다보면 방이고 마루고 마당까지 어지럽혔다. 심지어 놀다보면 할머니가 아끼는 항아리를 깰 때도 있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일터에 나가실 때마다 “아가, 재앙 떨지 말고 집 잘 보그라.”와 같이 당부라기보다 내게는 협박처럼 느껴지는 말씀을 빠뜨리지 않으셨다. 재앙 떨면 피 터지게 종아리를 맞는다는 협박 같은 뜻이 숨어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할머니가 밖에서 대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가셨고, 그 이후에는 나로 하여금 안에서 문을 잠그도록 하셨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와서 문 열어달라고 사정해도 절대 열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외로움과 심심함에 지쳐가던 어느 순간 내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쁘고 똑 소리 나게 해박하면서도 어딘지 슬퍼 보이는 고모가 지내는 방이었다. 책벌레 고모가 쓰는 방이 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평소 깔끔하고 자존심 강한 고모는 어린 나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모가 그 방을 들락거릴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방안의 풍경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책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뜨개질 작품들. 보고 싶었다. 용기를 냈다. 고모가 외출한 틈에 살짝 들어갔다가 조용히 구경만 하고 나오면 아무리 감각이 예민한 고모라도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라는 내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여는 순간 부모님을 그리며 서럽게 살아야 하는 내 불행이 종식될 것만 같아 가슴이 뛰었다. 아아! 수많은 책. 그 책들 사이에 끼어 아무도 모르게 죽어도 좋을 만큼 흥분되었다. 손길 가는 대로 책을 뽑아 읽었다. 동화책이나 읽어야 할 내게 그 책들은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몸에 전율이 일도록 행복했다.
다행스럽게도 고모는 눈치를 못 챈 모양이었다. 사흘이 가고 일주일이 되고 십여 일이 흐르면서 어느 새 나는 꽤 용감해졌다. 책장 앞에 있는 책들만 손대다가 책장 뒤에 쌓여 있는 책까지 손을 대었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내 운명에 불을 지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이다. 미친 듯이 읽었고 숨 막히도록 얼굴이 상기되었다. 히드클리프의 광기 넘치는 사랑과 캐서린의 마음을 읽으며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른다. 순간 생각했다. 나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에밀리 브론테 같은 소설가가 될 것이다. 사실 소설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막연히 이야기를 만들어 쓰는 사람일 것이라는 게 고작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치 소설가가 되기라도 한 듯 가슴이 쿵쾅거리고 목이 마르기까지 했다. 그것을 나는 운명이라 부르기로 했다. 운명은 나약한 인간인 나로서는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초인적인 것이라 믿었다.
그로부터 어디든 종이 쪼가리만 있으면 뭐든 끄적거렸고 종이가 없으면 마당에 막대기로 뭔가 끄적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다니던 여학교에 새로 오신 국어과 양귀자 선생님(소설가)의 영향으로 나는 소설가의 꿈을 굳혀갔다. 여고 시절에는 신춘문예 시즌만 되면 무병 앓는 사람처럼 앓았고, 심심찮게 들어오는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 작업으로 꽤 바빴다.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상 졸업과 동시에 안정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도 소설 창작에 대한 목마름으로 꽤나 괴로웠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생실습을 마치고 지도교수이자 소설가인 문순태 교수님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교수님은 내게 시간을 좀 줄 테니 소설 두 편을 써오라 하시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뭔가를 끊임없이 쓰고는 있었지만 미완성인 채로 원고지를 구겨 던지며 잠 못 이루던 밤만 많은 나로서는 진땀나는 일이었다. 그때 교수님이 내 귀에 남긴 짧은 한 마디가 50이 넘은 이 나이에도 잊히지 않고 있다.
“혜련아, 너는 맺힌 데가 많게 생겨서 소설 써야 해. 소설 써야 살아. 알았지.”
맺힌 것을 풀어내는 씻김굿 같은 게 소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맺힌 것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쭙지않게 시를 쓰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로 게으른 나를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가슴 속에 고질병처럼 남아 있다. 아니 쉽게 들어낼 수 없는 엄청 큰 암 덩어리처럼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는 소설을 꼭 쓸 것이다. 그 언젠가를 나는 명예퇴임 후 1년 지난 그 순간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명퇴하고 1년은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무작정 쉴 것이다. 30여 년의 교직 생활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린 지친 나를 위해 1년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쉴 예정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나면서부터 서서히 소설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맺힌 것을 풀어내는 씻김굿에 온 몸을 던져버린 만신처럼 그렇게 쓸 것이다.
“아가, 에미가 니 어릴 때부터 어디 용허다는디 다 찾아댕기면서 니 사주 넣고 물어보믄 니는 항상 붓대 잡고 살 팔짜라 카드라.”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이 말씀이 오늘밤 이 글을 쓰는 내 가슴을 또 한 번 쿵쾅거리게 한다. 정녕 내게 꿈은 운명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