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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와 절개의 시인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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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태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댓글 5건 조회 2,745회 작성일 2007-01-31 10:20

본문

<나의 시의 편력/조지훈...사상계>

시와 생활과…암흑의 계절에도 방랑은 있어
 
  나의 시는 한 때 <생활이 없는 시>의 표본(標本)으로 지적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예나 이제나 시는 생활의 가장 진실한 느껴움의 형상화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따라서 나의 시는 내 정신의 추이와 생활의 열력(閱歷)을 가장 충실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믿는다.
 
  생활이 없는 시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시에 생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생활을 정치적 경제적 생활 또는 동물적 물질적 생활과 동의어로 보기 때문이거니와 나는 생활의 의미를 그런데서 찾지 않고 생명이 요구하는 모든 가치를 지닌 이 현실의 삶을 생활이라 부른다. 다만 그 생명적 진실의 지향과 관심의 소재와 그 열도에 따라 시의 생활의 양상이 달라질 따름이다. 그러므로 졸시(拙詩)<완화삼(玩花衫)>의 일절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를 소우 좌익 논객들이 인민은 쌀을 달라, 독립을 달라 하는데 밀주가 익는 강마을을 찾는 시인은 어느 나라의 인민인가고 꾸짖으면서 생활이 없는 시라고 공격할 때 나는 분반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내 생활의 진실한 느껴움이었다. 다만 그 시가 발표된 것이 해방 후였다는 사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명적 진실의 느껴움은 시대를 초월한다. 전쟁 중에도 아기는 태어나듯이 암흑의 계절에도 방랑은 있다. 방랑의 정서에는 시대고도 인간의 근본고(根本苦)속에 깃드는 것이다.
 
 
  편력의 정신 가운데 변하지 않는 나를 찾으려 애써
 
  내가 시의 습작(習作)에 처음 손 댄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30년 내 시심의 소재는 엔간히 여러 차례 바뀐 듯하다. 그러므로 얼핏 보면 내 시는 여러 개의 마스크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은 소재의 취택과 모티브의 포착과 테마의 설정에 관심의 각도가 변동했다 뿐이지 그 진면목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내 시의 여러 가지 변동을 어떤 이는 참담(慘憺)한 방황이라 하고 어떤 이는 다각적인 실험이라고도 했지만 실상 나는 이러한 시의 변환으로써 인생을 편력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시작 30년을 학생에서 교원으로 지내 왔을 뿐 다른 직업을 가져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시의 편력을 통해 내 정신을 형성하였고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나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시 체질(體質)맞는 세계만 찾거나 나머지 소외 안 시켜
 
  이렇게 시를 써 오는 동안에 나는 어떤 세계가 나의 체질에 맞고 어떤 세계는 나의 시심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체질에 맞는 세계만을 찾고 그렇지 않은 것을 소외하려고 하진 않는다. 나에게 있어 시는 생활의 진실이요 시단적 명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미 닥쳐온 생활의 진실한 느껴움을 회피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시는 나의 생활에 충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상이라도 벗어던진 옷을 일부러 다시 꺼내 입거나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짐짓 도피의 우회로(迂廻路)를 찾진 않는다.
 
 
  동서양의 두 줄기 전통
 
  나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우리 근대적 전통이 그러하듯이 가슴 속에 동양과 서양이라는 평행하는 두 줄기 전통을 가꾸어 왔다. 와일드, 모드렐, 키츠, 예이츠, 발레리, 콕토, 릴케, 헷세 등을 좋아하면서 도연명, 이백, 두보, 한산, 백낙천, 소동파, 육방옹, 왕어양들을 탐독하였다. 성서, 그리스신화와 유, 불, 노장을 함께 읽었고 문학을 공부하면서 국어ㆍ국문학과 사학ㆍ민속학에의 관심에 더욱 열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시 정신에 있어서만 동서가 교착되었던 것이 아니라 시의 방법에 있어서도 극단의 기교주의와 극단의 반기교주의를 동시에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이 기교주의는 다분히 서구 시에서 받은 영향이고 반기교주의는 선의 미학에서 섭취한 것이다. 이 정신과 기법의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은 실로 오랫동안을 나의 안에서 평행되었고 이제 와서야 나는 겨우 그것을 초극(超克)하여 융합(融合)하는 길을 느낀 것 같다.
 
 
  처음 시 공부 할 때 심미(審美)의 꿈
 
  처음 시 공부를 할 때 나는 시인이란 미의 사제(司祭)요 미의 건축사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상이고 무어고 간에 시는 우리에게 아름다움만 주면 되는 것이라는 상당한 심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월광곡(月光曲)>과 <화비기(華悲記)> <고풍의상(古風衣裳)>과 <승무(僧舞)>같은 작품이 이러한 정신의 소산이다. 그러나 화비기는 이미 현실에 대한 반발과 퇴폐(頹廢)와 한이 있어 뒷날의 <비혈기>나 만근의 사회 시에의 경향을 내포하고 있었고 <승무>에는 전통에 대한 향수와 민족정서(民族情緖)의 아쉬움과 사라져가는 민족문화에 대한 애수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나의 처녀발표작(處女發表作)은 <고풍의상>이다. 그전에 학생시단에 습작시편이 발표된 바는 있으나 소위 출세작은 아니기에……. 이는 1939년 4월호 [문장지] 3호 추천시(推薦詩) 제 1회 당선작이다. (이 추천제 1회에 나의 <고풍의상>과 같이 뽑힌 시인과 작품은 김종한의 <귀로>와 황민의 <학>이었다. 잘못 지적된 곳이 많기에 후일의 사가를 위하여 정정해 둔다.)
 
  나는 이 문장지의 추천시 모집 광고를 보고 전기<화비기>와 이 <고풍의상>을 투고 했던바 당시 선자 지용(芝溶)은 선후 간에서 <화비기>로 좋기는 하였으나 너무 앙증스러워서 차라리 <고풍의상>을 택한다 하고 언어의 생략과 시에 연치를 보이라는 충고를 주었다. 다음 번 투고에는 <화비기> 계열 곧 서구적 영향(影響)의 시를 몇 차례 보냈더니 낙선되었고 시적방황(詩的彷徨)이 참담하니 당분간 쉬라는 평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선자의 뜻이 같은 계열의 작품을 밀겠다는 눈치였음은 알았으나 당시 나에게는 민족정서를 노래한 것으로는 <고풍의상>이 단 한편 있었을 뿐 그 계열의 작품이 더 없었기 때문에 반년여를 투고(投稿)를 중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새로 <승무>와 <봉황수(鳳凰愁)> 및 <향문(香紋)>을 써 보내어 소정의 관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승무>에 대해서 선자는 언어의 다채다각과 미묘곡절(微妙曲折)로 시의 미적수사(美的修辭)를 위하여 찬란한 타개를 감행했다고 칭찬하면서도 여기서도 시어의 생략을 충고하였고 정신에의 경도(傾倒)를 권고 하였다.
 
 
  민족정서와 전통에 매달려 의상, 무용, 건축, 도자기 등 소재
 
  <고풍의상>이나 <승무>는 무용을 주제로 한 것이고 그 무용의 유장(悠長)하고 미묘한 흐름은 언어의 지나친 생략으로는 도저히 그 선의 미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선자의 충고에 내신으로 불복하였다. 그러나 최종 추천작 <봉황수>는 운문적(韻文的) 가락을 산문(散文)의 형태로 외형 축략(縮略)한 그 조격(調格)과 에스프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으로 선자 및 선배 시인들의 과찬을 받아 흐뭇하였다.
 
  어쨌든 <고풍의상><승무> <봉항수> <향문>으로 나는 시단에 신인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민족정서(民族情緖)와 전통에의 향수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로써 신고전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의상ㆍ무용ㆍ건축ㆍ도자기 등을 노래한 작품으로 본보기 될만한 시가 없을 때여서 내가 이 경지를 타개한 것은 힘든 작업이었다.
 
  회고적(懷古的) 정조를 노래한 시편은 물론 나 이전에도 더러 있었지만 그것은 대개 명승고적에서 읊은 것들이었고 내가 시도한 바와 같은 종합적 이미지에서 추출 구상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의 이러한 노력은 전혀 전범을 삼을 작품이 없을 때였다.
 
  (어떤 평가는 나의 이 시기 작품을 선배의 영향으로 보려했으나 월탄(月灘)의 회고조는 나와는 방법이 다를 뿐 아니라 고적과 유물을 노래한 것이요, 그의 이런 작품의 발표 시기는{문장}지에 나의 발표와 전후한 거의 동시였고 석초의 <바라춤>은 조금 뒤였다는 것은 당시의 자료를 뒤져보면 알 것이다. )
 
  <고풍의상>과 <승무>와 <봉황수>는 우연히도 모두 다 먼저 무대를 설정 묘사하고 인물을 거기에 배치한 수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당시 내가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전연 비자각적인 공통성이다.
 
 
  역설의 의식
 
  나는 [문장]지의 추천을 쉬고 있는 동안 사실은 새로운 관심과 전환점으로 <고풍의상> 한편, 단벌을 응모했다가 첫 회 당선이 된 셈이지만 습작기의 첫 경향이던 서구시 영향계열의 여러 작품을 동인지 [백지]에 조동탁이란 본명으로 발표하고 있었다. 당시 원산에서 발간 계획하던 ‘조선시감(朝鮮詩鑑)’에는 이 계열의 작품이 편집동인에 의하여 선정되었고 또 시우들 중에는 <고풍의상>같은 세계보다 이 방향으로 시를 열고 나갈 것을 권하는 이가 많았다.
 
  이 {백지}에 발표된 작품들을 비롯한 그 무렵의 세계는 <계산표(計算表)><진단서><숙박기><재단실>등의 시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분히 지적인 바탕을 역설과 풍자와 환상으로 처리하려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백지]에 실린 <계산표>나 <진단서><우림령><향향어>등은 역시 토속적인 소재를 다루었고 <공작><부시(斧屍)>라든가 <춘일><락백(落魄)>같은 것은 또한 <월광곡>, <화비기>와 같이 심미적 경향이 짙은 것이었다.
 
 
  선의 미학
 
  학교를 나오자 나는 오대산 월정사 강원의 외전강사으로 가게 되었다. 추천은 재학 중 스무 살에 이미 끝났을 때이고 동인지 [백지]도 동인들의 검거사건으로 흩어지게 되었을 때였다. 이 절간 생활은 나의 시를 또 한번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변이된 생활의 쾌적미와 당시 내가 심취했던 시선일여의 경지 때문이었다. 일체의 정서와 주관을 배제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고 관조하는 서경(敍景)의 소곡조를 찾았다.
 
  이때의 나는 시어의 절약(節約)으로 단시형을, 단면의 전체성으로서의 상징의 법을 얻었다. 감각과 예지 그대로의 결정(結晶)으로서 정적을 생동태에서 파악(把握)하고 생동을 정지태로 포착하는 기법을 애용하였다.
 
  <산> <고사><마을><유곡><산방> 등이 이런 시기의 작품이다. 내 시에 애수의 가벼운 구름조차 스치지 않은 밝은 미소의 법열(法悅)만이 있는 시는 이 계열의 작품뿐이다. 나는 이 시기에 의식적으로 메타포어를 회피하였다. 내 시에 메타포어의 사용이 드문 것은 이때의 반기교적 기교론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정형시를 데포르메하고 비상칭 불균정 속에서 계조를 찾는 것이 그때의 의욕이었으나 그 시정신의 바탕이 쾌락이기 때문에 회화적 감각은 거의 음악적 일조로 처리된 셈이다.
 
 
  기다림의 정서
 
  그렇게 쾌적하던 생활도 몇 달이 안가서 처참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은 말기로 접어들어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강력동화정책이 실시됨으로써 우리말은 교육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회화와 언론 출판에서까지 금지되기 시작했다. 동아, 조선 양대 신간이 폐간되고 [문장]이 폐간되고 [인문평론]은 [국민문학]이라 개제하여 일본 문잡지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오대산에서 문장폐간호를 받고 울었다. 거기에는 <정야(靜夜)>라는 졸시(拙詩)가 실려 있었다. 이 시는 추천시에 응모했던 작품인데 내가 주소불명 되어 연락이 안 되어 옛날의 원고 뭉치에서 이걸 골라 실렸던 모양이다.
 
  그것은 무슨 종말을 예견하는 시와도 같았다. 산중에도 감시의 눈이 뻗치고 고독과 침울(沈鬱)과 분한에 젖는 정신은 독주만을 기울여 나는 마침내 다시 전지요양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나의 시는 <기다림><도라지꽃><암혈의 노래><바람이 노래>등 먼 곳의 이와 불빛을 기다리는 마음의 기원밖에 없었다. <비혈기>와 <동물원의 오후>와 같은 자학과 자조의 노래도 그 정신의 기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대미선전도 나는 이 절간에서 알았다. 싱가포르가 왜군에 의해 함락 되던 날 나는 과음의 나머지 졸도하여, 전보를 받고 내려오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시기에 월정사 강원학인으로 나의 방 시중을 맡았던 소년은 뒤에 시단에 나왔다가 요절(夭折)한 고 최인희군이었다. 최인희는 해방 후 동국대학에서 다시 나에게 배웠고 강릉에서 교원노릇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성북동 내 집 앞에 대문을 마주 보는 집에서 살았다. 병약한 젊은 스승인 나를 무척 염려하고 따르던 그가 과로의 탓으로 병을 얻어 타계한 지금 지난날의 인연을 생각하면 눈물겨워진다.
 
 
  논 기려(羈旅)의 한(恨)
 
  서울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일어난 나는 그때 화동에 있던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을 돕기로 되었다. 자금난 때문에 진도가 지지하던 참이라, 그저 도와 드리기로 하고 날마다 점심을 싸가지고 출근하였다. 이해 1942년 봄에 나는 성지순례와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다녀왔고 시우 목월을 거기서 처음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해 10월에 조선어학회의 검거가 시작되었고 그 날 10월 1일, 아마 왜총독부시정기념일인가 하는 날에 나는 화동회관에 갔다가 수색현장에 붙들려서 심문을 당했다. 아직 회원도 정식직원도 아니었던 때여서 그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있지 않아 놓여나오긴 했으나 정태진의 후임이 아니냐는 추궁을 맹렬히 받았던 것이다.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좇아 조만간 붙들려 갈 것을 온전히 체념하고 있었으나 다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때 여의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안호상(安浩相)박사 -이분도 퇴원만 하면 함흥으로 잡혀가기로 된 -의 병실을 찾아 옛 원고를 정리해 드리면서 날을 보내다가 나는 서울을 떠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의 방랑시편이 나왔고 그것은 곧 산암해정 사이를 떠도는 내 역정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다정다한의 하염없는 애수의 정조, 운수심성의 떠도는 그림자를 읊은 영탄조의 이 가락은 나의 생애 중 가장 잊히지 않는 절실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 <파초우><완화삼><낙화><낙엽><고목>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생명에의 향수
 
  방랑시편 다음에 내 시의 관심은 주로 삶과 죽음, 미움과 사랑, 꿈과 현실, 이러한 2원의 모순에 대한 나의 관조를 서정(抒情)하는 것이었다. <밤> <풀입단장>이라든가 그 뒤의 <흙을 만지며> <화체개현(化體開顯)><묘망(渺茫)> <창> <코스모스>등이 이 계열의 작품이다. 이러한 시편을 쓰던 시기는 내가 마침내 붙잡혀 북해도행 징용검사를 받고 노무감내불능이란 딱지를 단 채로 머리를 박박 깍끼어 놓여나온 뒤의 일이니 고향의 초옥에 누워서 해방의 날을 기다리던 때의 소산이다. 떠돌던 발길이 머무르게 되었고 신병 덕분에 쫓기는 정신이 소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의 작품 중 애정을 주제로 한 <풀밭에서> <산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절정>같은 시들은 그 바탕에 있어 이와 공통한 계열이라 할 수 있다.
 
 
  탁류의 음악
 
  은둔(隱遁)과 폐쇄와 소극적 반항, 회의(懷疑)와 방황과 갈구(渴求), 정관과 법열과 입명의 시심이 교착(交錯)하던 나의 시는 해방을 계기로 일대 전환점에 들게 되었다. 내 시정신의 기조는 역시 출세간적인 것이었으나 오랫동안 막아 두었던 정열은 하나의 사명감과 함께 나를 세간적인 것으로 이 현실의 탁류 속에 뛰어들게 했던 것이다. 나는 시를 통하여서 꿈과 현실의 2원의 극복에 대결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탁류속의 한줄기 정열한 저류의 음악이 되고자 한 나의 의욕은 스스로도 가상하였으나 그것을 시로서 성취하기란 졸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두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이들 이른바 사회시편을 자선시집에 수록하지 않았고 제3시집에 이르러 이들을 전부 몰아서 그로 한 권을 엮고 <역사 앞에서>라 이름 지었던 것이다.
 
  시로선 성공한 편이 못되지만 그 시편들을 일관하는, 현실에 참여하면서 항상 그 상극과 혼탁을 뛰어넘은 청순한 수맥을 지키려고 한 뜻은 나의 생활의 신조로서 굽힘없이 자신을 초극하고 지켜왔고 그것이 모두 시공부로 이루어진 것임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해방20년 동안을 나는 문화전선과 사회참여의 주류에 뛰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항상 내 본연의 자리에 돌아와 지키는 것을 잃지는 않았다.
 
  <산상의 노래> <비가 내린다> <불타는 밤거리> <역사 앞에서> 등의 해방시편과 <다고원에서> <조이원에서> <너는 38선을 넘고 있다> <현강무정> <중로에서> 의 전진시초와 <빛을 부르는 새여> <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잠언> <터져 오르는 함성> <불은 살아있다> 등의 저항시편은 모두 그때그때의 현실을 주제로 하여 쓴 것이지만 앞서 말한바 에스프리의 기조는 한결 같은 것이 없다.
 
  나는 어쩌다보니 해방 이래 6ㆍ25동란을 거쳐 4월 혁명에서 오늘까지 스스로 문화전선의 전위가 되어 있다. 산함해정을 떠돌던 발길이 목포 부산 춘천 해주 평양 함흥으로 종군하여 전선을 구치(驅馳)하던 일이며 4월 혁명 전후의 그 긴장감은 나에게 뜻 깊은 회억을 자아낸다.
 
  그래서 나의‘육연제기’에는 무사담연, 유사감연의 두 구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요즘 시필을 멈추고 있다. 내 자신을 정리하고자 함이다. 그동안 내버려두었던 학문적인 자료나 가다듬어 몇 편 안되는 논문이나마 손대었던 것의 정리를 끝마치면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시를 써볼 심산이다.
 
  새로 붓을 들면 당신이 밟아온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시의 어느 것과도 같지 않고 또 그 어느 것과도 다르지도 않은 길일 것이다. 라고…….
 
  써봐야 알지! 내 생활의 관심이 어느 곳으로 이동할지 그건 아직 나도 모른다. 회상의 시론을 쓰는 마음은 시를 쓰고 난 다음 보다 더욱 허전하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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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프로그램 / 작가의 생가를 찾아서. )


지조와 절개의 시인- 조지훈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영양으로 향하던 날 아침, 조간신문을 펴니 '「조지훈 전집」23년만에 출간'을 알리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하나, 그 날은 마침 조지훈의 생가를 찾아가는 날이었으므로 필자로선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집은 1973년 일지사에서 펴낸 뒤 절판되었다가 후학들에 의해 정갈한 모습을 갖추어 23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이었다. 지난 3월 「시」, 「시의 원리」, 「한국문화사 서설」, 「채근담」 등 4권이 먼저 나왔고, 그 나머지 「문학론」, 「수필의 미학」, 「지조론」, 「한국 민족운동사」, 「한국학 연구」가 나남 출판사에서 출간됨으로써 총 9권이 완간 되었다. 혹시 그를 「승무」의 시인, 청록파 중의 한사람쯤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번에 나온 전집을 본 사람들은 눈이 둥그래졌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시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이론과 한국 문화사, 민속학 등에 두루 발을 뻗치고 있는 그 지적 영역의 깊고 넓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홍일식, 최동호, 인권환, 이동환, 김인환, 홍기삼 등으로 구성된 편집위원들이 조지훈 전집 발간을 두고 '현대정신사의 지도를 완성하는데 기여'하는 일이라고 의의를 천명할 때, 그 '한국 정신사'라는 대목에 새삼 남다른 감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은 이육사의 고향 안동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안동에서 임하댐을 지나 가릿재 길을 타고 달리다 보면 영양읍에 당도할 수 있고 읍에서 7킬로미터쯤 더 달리면 도계와 가곡의 중간에 있는 주곡동에 이르게 된다. 영양은 현존 작가 이문열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일월면이지만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젊은 날의 초상」의 창작무대가 되었던 석보면의 장수재가 아직도 산골의 깊은 정취를 간직하고 동해로 뻗어 있다.

주곡동 마을 어귀에 이르면 250년 된 느티나무가 파수꾼처럼 서서 이곳을 찾아온 과객을 먼저 맞이한다. 때때로 승용차가 질주할 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하고 한가로운 도로변에 늦가을의 나무와 숲과 맑은 하늘이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을 '시 마을'의 배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곳에서 시인 한 사람 나오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했을 거라는 생각조차 든다. 느티나무 안쪽 오솔길을 걸어 들면 조지훈 시비를 만날 수 있다.

검은 바탕에 펜으로 그어 놓은 듯 희미한 서체로 그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이 새겨져 있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 아득히 풀피리도 들려 오누나……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널리 알려진 「승무」 대신에 이 시가 새겨져 의아했으나 시를 읽는 동안 이 시를 선택해서 시비에 옮긴이의 뜻이 헤아려지는 듯하다.

1981년에 장남 광렬씨의 설계로 세워졌다는 시비를 둘러선 숲 저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펼쳐져 있는 마을이 주곡동이다.

주곡동이 영양 지역에서는 꽤 명망이 높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택시기사가 "아, 한양 조씨들 일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요?"하고 금방 알음을 해 온 것부터도 그렇다. 이곳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마을 곳곳에는 오래된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그 중 어떤 것이 시인의 종택인지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솟을대문을 앞세운 ꁁ자형의 고색 창연한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들어 왔다. 뿌리깊은 양반 가의 종택이라는 것이 대뜸 느껴졌는데, 집 앞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바윗돌 하나가 세워져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조지훈 생가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동네에서 만난 할머니는 이 집을 '조박사 집'이라고 일러주었다. 이 마을에서 나온 박사만 해도 20명이 넘는다고 하니 이 마을의 범상치 못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곡동이 그만큼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데에는 이곳에 처음 조씨 가문의 기반을 잡은 선조호은공 조전(趙佺)이래 대대로 학문적 기풍을 전수해 온 내력이 숨어 있었다. 조지훈 생가 문전에 있는 호은(壺隱)종택의 호은(壺隱)은 선조 조전의 호이다. 생가 옆에 호은정(壺隱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별채는 당시 이 지방의 유학을 상징하는 정신적, 학문적 산실이었다 한다. 지훈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는데, 그가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가문에서 세운 월록 서당에서 서당식 교육을 받았던 것은 한학자인 조부 조인석이 일본식 현대교육을 받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인석은 지훈이 유교적 전통과 문벌을 계승해줄 것을 원했다고.

지훈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부 조인석은 학문과 문장, 지조가 높은 성균관 유생출신으로 6·25의 와중에 희생된 인물이다. 증조부가 되는 조승기는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자결했고, 지훈의 부친인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영문학도로서 유학시절부터 해방되기까지 이 호은정에서 청소년을 모아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가르쳐 일인들로부터 고초를 당했던 인물이다. 조지훈이 향유(鄕儒)로서 융성한 문벌을 형성한 가문의 종택에서 성장했고, 민족정신과 청렴한 생활을 강조하는 가문의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유교적 휴머니즘의 색채를 보이는 지훈 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시사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바깥쪽 행랑채와 사랑채 쪽은 비워져 있으나 안채에서는 누군가 살림을 사는 흔적이 완연한데도 아무리 불러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집을 비우고 외출을 한 듯했다. 옆집에 사는, 조 시인과는 7촌간 된다는 조동훈씨 댁에 가서 물어보니, 그곳에서 사는 이모 씨라는 분은 인척은 아니고 대신 농사를 지어주며 집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잠시 마을에 머무는 동안 내가 마주친 이는 서너 분의 할머니들뿐이다. 제법 큰 마을인데도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수 백년 동안 융성했던 마을이었으나 시대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 고여 있는 듯 퇴락 한 모습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쓸쓸히 논길을 걸어 나오는데 조지훈 시 한 수가 머리 속을 스친다.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을 바라보나 /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별리」중에서)



2.

지훈 본명 조동탁. 사진으로 보는 그의 모습은 검은 테의 안경과 굳게 다문 다부진 입매가 전형적인 학자요, 고고한 선비다. 고대 교수로 20여 년 간 재직하면서 문학외적인 저술을 많이 남겨 놓았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진 면모는 그가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시에 계승 발전시킨 대표적 시인이자,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를 이룬 3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조지훈 시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동양적 자연관,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과 향수, 민족정서의 형상화'는 오랜 문학적 방황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시 세계였다.

그의 문학적 체험은 9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 풍미하던 프로문학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동요를 지어 본 것이 문학의 첫 경험이었다. 그는 당시 정규과정인 일제교육을 받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 조선어, 수신, 역사 등을 배우며 선비정신과 학자적 탐구정신을 습득해 나갔다. 그러나 일찍이 문학적 재질의 싹을 보였던 까닭에 지훈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조부 조인석은 '너는 문인으로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보에 의하면 시를 본격적으로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16세부터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어려서부터 시가(詩歌)를 들려주던 아버지와 큰 형 세림(본명 조동진)이었다. 자전적인 글 「나의 역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세 살 위인 맏형 세림이 '문학의 싹을 길러준 사람'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지훈과 함께 주곡동 마을의 문집 「꽃 탑」을 펴내기도 하고 소년회를 조직하기도 한 세림은 지훈의 문학적 자질을 일깨워 주었으나 아깝게도 21세에 요절하였다. 이번에 나온 조지훈 전집은 요절시인 조세림이 남긴 「세림시집」 시편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지훈이 주곡동 마을을 처음 벗어난 것은 17세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동향 시인인 오일도가 주재하던 '시원사(詩苑社)'에 머물면서 시 습작을 계속했고 20세가 되는 1939년에 혜화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조지훈의 시를 연구한 서익환에 의하면, 조지훈은 36년에서 39년에 이르는 습작기의 시기에 시문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와일드의 심미주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아방가르드, 쉬르, 포오멀, 다다 등에 경도함과 함께 도연명, 이백, 두보, 백낙천 같은 동양의 시인들도 두루 섭렵하는 등 동·서양에 걸친 방대한 독서체험을 가졌다. 이 시기에 창작된 시들은 심미주의 경향의 시, 모더니즘 경향의 시, 전통지향의 시들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적 혼돈은 유교가문에서 습득한 생래적인 민족주의적 정서와 문학적 체험 사이에서 비롯된 정신적, 사상적 갈등이라는 게 서익환의 지적이다. 심미적, 주지적 시풍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습작기의 이런 혼돈과 갈등은 지훈이 후에 자신 속에 내재된 근원적 세계를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그만의 시적 자아를 획득해 나가게 된다.

혜화 전문학교의 입학은 지훈이 최초로 정규교육과정을 밟았다는 점, 이를 통해 유교적 인간관을 가진 그가 불교적인 정신세계와 조우하면서 정신 세계를 넓혀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교적, 선적 세계가 그의 시 세계에 본격적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극예술연구회', '중앙무대', '낭만좌'와 '조선어학회'를 드나들며 수많은 선배 문인, 예술인, 학자들과도 교류한다. 이때 그가 만난 문인들이 한용운, 서정주, 김달진 등인데 이들로부터 '지절의 민족정신', '동양적인 체념과 생활이념', '순수 서정'의 시정신 등을 계승받는다. 한편으로는 니체, 쇠스토프, 메레주코프스키 등의 사상을 책을 통해 접한 것도 그의 시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지훈은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이, 그 다음해에 「봉황수」, 「향문」 등이 2차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훈의 시를 추천해 준 사람이 정지용이라는 것. 정지용은 조지훈이 서구 취향의 시인보다는 '위축된 정신이나마 조선의 자연풍토와 조선인적 서정과 최후로 언어 문자를 고수하는' 전통지향의 시인이 될 것을 권고한 시인이다. 지훈이 시적 방향을 정하는데 그의 추천과 권고가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지적된 바 있다.

지훈의 데뷔작 「고풍의상」은 조지훈이 '서구 시를 모방하던 그때까지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기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나의 역정」)이라고 밝힌 만큼 그의 시력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와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고풍의상」 중 일부


봄밤과 처마의 곡선, 아름다운 전통 한옥을 배경으로 한 이 시는 '풍경 / 반월 / 주렴 / 두견' 등의 소재와 더불어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과 곡선미, 또 그것을 입은 여인의 자태와 율동미가 어우러지면서 시적 심미감이 고조되며, 시인은 그 속에서 물아일체의 경지에 흠뻑 젖어 있음을 보여준다. '고아라 / 밝도소이다 / 흔들어지다'와 같이 어미 처리의 섬세함과 순수한 우리말에 대한 인식도 돋보인다. 일제의 침탈 속에서 역사와 전통, 나아가 민족언어마저 말살되어 가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왜 시인은 고전 의상에 애착을 보이고 그것에 찬탄과 탐미의 시선을 보내는가?

여기서 시인의 내면 속에 내재된 지향과 열망을 볼 수 있다. 즉, 「고풍의상」은 그 자체로서 '조선심(朝鮮心)'을 표현하고 있으며, 민족의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제재이다. 이 시는 옛것에 대한 회고와 애수에 머무르지 않고 고전의상의 재발견을 통해 역사와 민족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열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지용이 이 시에 대해 '고유한 하늘 바탕이나 고매한 자기 살결에 무시로 거래하는 일주운가와 같이 자연과 인공의 극치'라고 평하면서 '시단에 하나의 「신고전」을 소개'한다는 추천사를 쓴 점이 인상적이다. 정지용은 지훈 시가 앞으로 고전적인 작풍으로 나갈 것임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추천작 「봉황수(鳳凰愁)」도 '사라져 가는 것, 퇴락 해 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민족혼의 부활과 국권 회복의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의 삶과 시에 가장 큰 분기점을 마련해 준 때가 있으니, 그것은 혜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외전강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때 그는 다른 자리를 마다하고 굳이 사찰의 강원을 택했다고 한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그로선 자기 침잠에 몰두할만한 환경으로 산사를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경(經)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고, 시를 읽고 싶으면 시를 읽고, 예불을 하고 싶으면 예불을 하고, 술을 먹고 싶으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이 나중에 병을 얻어 산을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월정사 시절에 얽힌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먹물 장삼 대신 흰 두루마기를 입고 긴 머리를 한 그의 모습은 오대산에 괴승이 나타났다는 소문으로 비화되어 강릉에서 신문기자가 취재하러 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학승들과 「시문선답」과 같은 대화를 하며 문학교육과 선미를 가르치고 배웠다 한다.


승 : '어디가 그대의 고향인가'

나 : '구름 좋고 달 밝은 곳 서역만리길'

(하략)

-「선문시답(禪問詩答)」중에서


산사생활을 통해 조지훈은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시정신을 깨우치게 되며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굳히게 된다.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것은 동양적 자연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자연은 불교와 선미가 용해된 자연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그도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절간생활은 나의 시를 또 한 번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변이 된 생활의 쾌적미와 당시 내가 심취했던 시선일여의 경지 때문이었다. 일체의 정서와 주관을 배제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고 관조하는 서경의 소곡조를 찾았다…… 감각과 예지 그대로의 결정으로서 정적을 생동태에서 파악하고 생동태를 정지태(靜止態)로 포착하는 기법을 애용하였다.

-「비승비속지탄」 중에서


「산방(山房)」, 「산1」, 「산2」, 「유곡(幽谷)」 등의 시편을 보면 당시 지훈의 눈에 비친 동양적 자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조부 밑에서 정통 한문 교육을 받고 성장한 만큼 지훈의 한시적 교양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번 전집에도 그가 번역한 한시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한시적 교양과 선적 감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특색을 보이는데 김재홍은 이 점을 들어 그의 시가 만해 시와 근친관계를 보인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자연표상을 통해 인생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소월 시와 닿아 있으며 이 점에서 지훈 시가 서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통 시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또 하나, 그의 초기 시 세계가 보여주는 특질은 '조화와 교감'의 미학이다. 「승무」에서 볼 수 있는 '진, 선, 미 합일의 미학', 「고사(古寺)」에서 볼 수 있는 '정적 미, 고취 미를 바탕으로 한 선감각과 화해의 미학'은 지훈에게 시와 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조화되면서 멋스러움으로 표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에 머무르기엔 나라 안팎의 정세가 너무나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는 '암흑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악했던 시절이었다. 조지훈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암울한 비보 속에서 어느 날 「문장」지 폐간호를 받는가 하면 월정사 서실 마저 수색 당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다. 그는 통음의 시간을 보내다 졸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오대산에서 내려와 요양 차 서울에 상경한 이후 3년간은 방랑과 절망의 시기였다. 경주에 있는 목월을 만나러 가거나, 친구들을 방문하면서 암울한 마음을 달래던 그는 1943년 가을에 아예 주곡동으로 낙향해 버리고 만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가담한 상황에서 그 역시 친일단체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차라리 붓을 꺾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나중에 「지조론」이라는 글을 쓸 만큼, 변절에 대해서 완곡한 입장을 가졌던 그가 불의에 순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낙향 이후의 심경에 대해서는 「무국어(撫菊語)」라는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는 수 없이 낙향해 버리고 만 것이 어느덧 철 수가 바뀌었다. 날마다 산을 바라보고, 밤마다 물소리를 이웃하는 것밖에, 나는 책 한 권 바로 읽지 못하고 소란한 세상을 병든 몸으로 숨어서 살아간다. 친한 벗에게는 편지 한 장 오지 않고, 들리는 소문이란 쫓기는 백성의 울부짖음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 어쩌지 못할 설움 속에 그래도 울먹거리는 마음을 다소 가라앉히기는 노란 국화가 피면서부터였다……. 아아 국화가 나에게 한갓 슬픔을 더해준다 기로서니, 영혼과 육신이 함께 목마른 지금의 나에게 국화가 없으면 낙엽이 창살을 휘몰아치는 기나긴 가을밤을 어떻게 견디랴.

-「무국어」 중에서



3.

해방과 함께 그의 생애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교육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였다. 혜화 전문학교, 경기 여고, 서울여의대, 동국대학을 거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시인으로서 창작도 활발히 해 나갔다.

유치환, 김동리, 박두진, 서정주, 조연현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단을 건설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가 <청년문학가협회> 창립대회에서 발표한 「해방시단의 과제」는 그의 문학관을 드러내 주는 글이다. 「순수시의 지향」(47), 「정치주의 문학의 정체」(47),「고전주의의 현대적 의의」(49), 「현대문학의 고전적 의의」(49) 등 순수문학적인 관점의 글들이 이때 쓰여지게 되며 최초의 시인론인 「김영랑론」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 해방 후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 1946년에 일어난다.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세 사람의 시를 엮은 시집 「청록집」이 발간된 것이다. 어느 눈오는 날 밤에 성북동 지훈의 집에서 원고를 뽑았고 거기에 목월이 「청록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박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에서 이를 시집으로 발간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문장」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었고, 후일 청록집이 세 시인 모두의 시적 고향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었다. 지훈도 밝힌 바, 「청록집」은 암흑기 상황에서 발표할래야 발표할 수 없었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된 해방의 감격과 혼란한 정치적 시류 속에서 시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의욕과 우리 시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교량으로서의 전통을 집성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이 시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그들이 추구한 자연의 발견과 그 탐구의 노력은 그것 자체가 신선한 생동감을 던져준다'는 김재홍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년대는 조지훈에게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지만, 6·25전쟁으로 조부와 부친(납북된 후 소식이 끊김)과 어머니, 그리고 아우까지 잃는 불행한 가족 사와 함께 시작된 연대였다. 피난지에서도 종군 작가단을 결성하여 종군한 그는 강한 휴머니즘의 태도와 반공의식,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갖게 된다. 전쟁시의 명편 중의 하나로 꼽히는 「다부원(多富院)에서」를 보면 잔혹한 전쟁을 통해 허망한 인간 상실과 파멸의 현장을 본 그의 비관적인 심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찍이 한 가을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긴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多富院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多富院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다부원」 중에서


이제 조지훈의 시 세계는 고전적인 정서와 시선일체의 초기 시 세계에서 해방 전후사와 전쟁, 그리고 4·19를 겪으며 점차 역사와 현실의 세계로 확대되어간다.

고난과 충격의 시기 속에서도 시 창작을 중단하지 않은 그는 1952년 첫 개인시집인 「풀잎단장」을 발간하고 이후,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 등을 펴내며 개인적으로는 가장 화려한 문단시절을 보내게 된다. 시뿐 아니라 비평활동도 활발하게 해나갔다. 특히 그가 쓴 「시의 원리」(53)는 현대시문학사상 최초의 정통 이론서로, 그의 문학활동 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저서이다.

말년의 그는 「여운」(마지막 시집)의 발간 외에는 학문적 탐구와 저술 활동에 더 힘을 기울였다. 60년대에 그가 펼친 저술활동은 실로 화려한 것이었다. 주요 저서의 목록만 봐도 「한국현대시사의 쟁점」(60), 「한국문학의 전통」(63), 「한국현대시문학사」(64), 「한국문화사서설」(64), 「한국문화사대계」중 제1권 「민족 국가사」(64), 「신라가요연구논고」(64), 「한국민속학소사」(64), 「한국민족운동사」(63) 등 그 영역의 광활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민속학에 대한 관심도 깊어 196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무속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조지훈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시론에 집중되고 있고 전체적인 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그 이유 중에는 그의 지적 편력이 이렇듯 방대한 탓도 있다. 그는 단순히 시인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영역에서 정신적 탐구를 부단히 개척해 나간 문단과 학계의 거물이기에 그의 학문과 문학을 포괄하는 연구작업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시인, 지사, 국학자, 논객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그의 일생은 생각보다 짧았다. 기관지 확장 및 폐기종이라는 병을 얻어 아까운 생을 마감할 때가 1968년. 주곡동 생가에서 부친 조헌영과 박노미 사이에서 3남 1녀 중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을 때가 1920년이었으니 겨우 48년의 생애를 살다 간 것이다.

주곡동에 와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이곳에 한국문인협회의 문학상징 동판조차 서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을 어귀에 시비가 세워져 있고 집 앞에 생가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고는 하나, 이 정도도 가족들이 사재를 털어 마련해 놓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까 지나왔던 마을 어귀에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라고 써 붙인 안내 표지판이라도 서 있다면 좋을 것이다. 행여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 '이 아름다운 곳이 「승무」의 시인인 조지훈의 고향이었단 말이지'하고 새삼 다른 느낌을 가지고 이곳을 둘러볼 것이기 때문이다. 250년 생 느티나무가 있는 길의 안쪽에 조지훈 시비가 있다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시비 안내표지도 없으니 말이다. 숲 속에 은폐된 산사처럼 시인의 마을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한 걸음 비껴난 채 고적하기만 하다.



4.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제1회 홍명희 문학제의 소식을 접하였다. 올해 초, 사랑채 하나만 남은 괴산의 초라한 고택을 보고 왔던 필자로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제월리의 사랑채 앞마당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홍명희의 문학세계에 대한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 화면이 뉴스를 통해 나오기도 하고 최근엔 모 방송국을 통해 「임꺽정」이 대하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송되고 있으니, 서점에서 「임꺽정」에 머무르는 독자들의 시선이 남다를 것이라는 점, 아울러 작가 홍명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될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이 없지 않은 것이다.

올해는 문학의 해이다. 한 해의 막바지에 이르른 시점에서 돌아보는 '문학의 해'를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은 다소 착잡하다. 국가적인 문호가 우연히 들렀던 여관까지 명패를 붙이고, 그것을 지역의 영예로 간직하는 외국의 경우를 자꾸 들먹이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화유산의 현주소가 초라하기 때문이 아닌가. 작가가 생전에 사용하던 온갖 자질구레한 유품까지 철저히 보전되고 국가적인 유적으로 관리되는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방치된 작가가 많았음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본 현실이었다. 더욱이 채만식이나 염상섭 같은 작가의 경우도 변변한 기념관 하나,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세워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 서고 보면 민망함마저 없지 않다. 아직 우리 문화유산의 현주소는 '길 닦기' 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소한 평가일까.

영양 행을 마지막으로 생가탐방을 타이틀로 한 연재는 일단 막을 내리는 것이지만, 발길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문화유산 찾기는 유행 같은 일과성 바람이 아니다. 각지에 흩어진 은폐된 문학유산을 찾아 그 먼지를 닦아내고 그 터를 바로 세우고 사람들이 자꾸 찾아주어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은 고인이 된 작가들 뒤에 남겨진 산 자의 몫이다. 문학을 사랑하고 작가를 아끼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작가는 불멸한다. 보이지 않는 문화의 힘은 그 속에서 배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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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박태원님의 댓글

박태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일제말의 문인탄압에 굴하지 않고 차라리 붓을 꺾었으며, 동서양의 사상과 문학을 섭렵하고
한국의 사상과 문학과 미학을 정립하려고 평생을 바친 선생이기에 글을 소개합니다.

박태원님의 댓글

박태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남양주시에 있는 조지훈선생의 묘소를 탐방하는 문학기행도 기획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김현길님의 댓글

김현길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박태원 시인님 승무의 시인 조지훈님에 대해 잘 모르던 부분 까지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지훈선생의 묘소를 탐방하는 문학기행 의미 있을것 같네요. 저는 멀어서 힘들겠지만.^^

최경용님의 댓글

최경용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문학비 건립 및 문학제 행사도 확정 되었으니 계획데로 준비하여 나가기위해서라도 한번 모여할것 같고
겸사하여 조지훈 선생 묘소 탐방 문학기행도하고 동인들 만남의자리도되고 좋을것 같아 적극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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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87 이순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53 2012-05-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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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52 2005-03-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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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82 김화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47 2008-11-05 2
20781 이순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47 2011-08-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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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중 박태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2746 2007-01-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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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댓글+ 5
雁路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44 2005-05-2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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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꿈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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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댓글+ 11
김희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37 2005-05-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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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외출 댓글+ 3
최수룡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37 2008-05-2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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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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